신선의 겨울 정원이 펼쳐진 양평 백운봉 (2013.1.19)
다음 달에 드디어 아기가 태어난다. 그전에 겨울산의 기운을 받고 와야겠다고 아내에게 말했고, 아내도 한번 다녀오라고 했다. 겨울산행 얘기는 뱃속의 아기도 들었을 텐데, 사실 내가 미루고 미루다 산행을 못한 것이다. 이제는 말만 앞서는 아빠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겨울 산에 가야 한다. 무엇인가 고개가 꺄우뚱해질 억지 논리지만, 겨울산행을 떠나는 이유로는 나름 근사한 것 같다.
금요일 밤에 아내에게 내일은 꼭 산에 간다고 했더니, 토요일 아침인데도 아내는 이른 시간에 일어나 보온병에 도시락을 준비해 준다.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니 서울 아침기온 영하 15도, 양평은 영하 17도라고 한다. 기온이 더 낮아도 이제는 말을 지키기 위해 집을 나서야 한다. 배낭 속 보온병에 담겼을 아내의 따뜻한 마음을 생각하며 집을 나서니, 마을버스와 전철을 타고 청량리역까지 가는 동안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 가는 곳은, 양평읍을 내려다보고 있는 용문산 백운봉이다. 양평을 지나다니면서 보이는 뾰족한 산세가 매력적이라서 한 번쯤 오르고는 싶지만, 오르려면 꽤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주말의 중앙선 기차는 입석이기는 하지만, 청량리에서 양평까지는 불과 30분이 걸릴 뿐이니 웬만한 서울 근교의 산보다 가깝다. 양평역에 내리니 북쪽으로 솟은 백운봉이 눈에 들어온다.
양평역에서 버스를 이용해 보려고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갔으나, 정확한 노선버스를 찾기가 쉽지 않아 결국은 택시를 타고 백운봉 자연휴양림까지 간다. 택시요금 5200원, 서너 명이 함께 오면 택시요금을 절약할 수 있고, 버스와 달리 택시는 자연휴양림 사무실 앞까지 올라가니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 백운봉 자연휴양림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지만, 왠지 황량한 느낌으로 산세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
휴양림 사무실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의 새속골을 따라가다가 헬기장을 거쳐 곧바로 백운봉 정상으로 가는 짧은 코스가 있지만, 나는 갈림길에서 두리봉(백승봉)을 먼저 오른 후 헬기장을 거쳐 정상에 오르기로 한다.
두리봉 오르는 길의 얼어붙은 눈 위에는 며칠 전 오른 사람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두리봉은 해발 500미터를 약간 넘는 높이라서 뒷동산 정도로 생각했는데, 곳곳에 밧줄이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가파르고 힘들다. 게다가 양평의 남한강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에 얼굴이 마치 얼어붙은 귤껍질 같이 푸석푸석 해진다.
오르막길을 오르는데도 몸에 한기가 들어와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올랐더니, 귀, 손가락, 발가락은 시린데 몸에서는 땀이 난다. 인생이든 산행이든 급하더라도, 열정이 넘치더라도 내 페이스를 가져야 하는데, 급하거나 열정이 끓어오를 땐 페이스를 놓치고, 부작용이 생기는 것 같다. 두리봉에 오르는 길이 춥기는 해도 뒤돌아 보면 조망이 트여서, 양평 시내와 양평을 둘러싼 남한강, 넓은 뜰, 주변의 겨울산들을 보면서 오를 수 있다. 추위에 오래 쉬지 않고 올랐더니 30여분 만에 520미터 두리봉에 오른다. 두리봉에 오르니 이제는 앞쪽에 백운봉 정상이 보인다. 북쪽 저 멀리 용문산 정상도 보인다.
두리봉 정상에서 잠시 주변 조망에 빠져있다가 백운봉으로 오르는 능선으로 옮겨갔더니, 바람에 날려 쌓인 눈에 발목까지 빠진다.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서 몸을 낮추고 스패츠를 착용하니 등산화 안으로 눈도 들어오지 않고 다리가 따뜻해진다. 하지만, 바람은 여전히 매서워서 귀 덮개를 했어도 귀가 시럽다.
헬기장에 도착하니 이제 백운봉이 바로 눈앞이고 용문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헬기장에서 다시 한번 하얀 설산의 모습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내다 내려오니, 자연휴양림에서 바로 올라오는 새 속골 길과 만난다. 헬기장과 백운봉 사이의 안부는 양쪽 봉우리에서 날아온 눈이 쌓여 종아리까지 푹푹 빠진다. 두리봉길로 오면서는 단 한 명의 등산객을 만났는데, 주능선 길에 들어서니 삼삼오오 무리 지어 오르는 등산객을 만난다.
안부를 지나 백운봉 아래 8부 능선쯤 도달하니 나무 가지에 맺힌 하얀 상고대가 장관이다. 파랗다 못해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상고대가 펼쳐진 모습은 동화 속 세상 같다. 동화 속 세상에 온 아줌마 아저씨들 모두 천진난만한 아이들처럼 환한 모습으로 사진 찍기에 바쁘다. 백운산 새하얀 상고대는 백발의 신선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라, 나는 마치 신들의 정원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느낀다.
상고대에 홀려 오르다 보니 정상은 힘들지 않게 도착한다. 정상에 서니 백운봉에서 함왕봉을 거쳐 용문산 정상까지 새하얀 능선이 이어지고, 용문산이 거느리고 있는 동쪽의 중원산, 서쪽의 유명산도 하얀 어깨를 나란히 걸치고 있다. 서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리니 국수리 청계산과 북쪽 평내의 천마산 정상도 하얀 모습을 하고 있고, 용문산 너무 저 멀리 명지산 산군들도 어깨는 감추고 하얀 봉우리만 내밀고 존재감을 알린다. 동쪽으로 오크밸리와 그 뒤로 자세히 보면 거대한 산이 희미하게 들어오는데, 확신할 수는 없지만 동쪽의 높고 큰 산이라면 치악산으로 추측해 본다. 다시 시선을 남쪽으로 돌리면 앵자봉, 양자산과 서쪽으로는 검단산, 예봉산이 조망되는데, 정상은 하얀 눈이 쌓여서 겨울산 들이 하얀 모자를 뒤집어쓰고 추위를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상에서 함왕봉 쪽 능선으로 잠시 내려섰다가 정상을 너무 일찍 떠나는 게 아쉬워 다시 백운봉 정상으로 돌아와 아내의 온기가 느껴지는 점심을 먹는다. 이런 풍경을 아내와 함께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집에서 같이 보려고 아름다운 상고대와 풍경 사진을 카메라 메모리에 남기고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에서 함왕봉 능선으로 하산하면서도 8부 능선까지는 온통 하얗기만 한 상고대가 이어지고, 바람에 날아온 눈으로 길은 미끄럽고, 바람은 여전히 싸늘하게 불어와서 춥다. 겨울 산행답다. 대부분 사람들은 올라왔던 양평읍 방향으로 바로 내려가서인지 사람이 다닌 흔적이 적은 함왕봉 능선을 따라가다가 사나사 방향 표지판을 만나서 방향을 튼다.
사나사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에 몇 번이고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쌓인 눈이 많아서 아프지는 않다. 바람에 날아온 눈이 영하의 날씨에 살짝 얼어있어서 아이젠도 소용없다. 걷는 듯, 미끄러지는 듯 내려가니 함왕 성터를 지나고, 추운 겨울 계곡이지만 살짝 물이 흐르는 계곡이 나온다. 이렇게 추운 날씨인데도 꽁꽁 얼지 않은 걸 보면, 용문산 지하수는 약간의 수온을 유지하고 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정신없이 내려오긴 했지만, 8부 능선쯤에는 바람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소리, 6부 능선부터는 졸졸 물소리가 들리 더리, 3부 능선쯤 내려왔더니 이제 새소리가 들린다. 높이에 따른 소리가 자연스러운 것일 텐데 그동안 산을 다니면서 느끼지 못했던 것을 오늘은 민감하게 느낀다. 어쩌면 산 정상은 신선들의 공간이고 이어서 나무들의 공간, 계곡과 물의 공간, 동물들의 공간, 마지막으로 산 아랫부분은 사람들의 차지인 게 자연스러운 것 같다.
산 중턱까지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서울 산의 모습들이 생각난다. 심지어 서울 도심의 동쪽을 감싸고 있는 낙산은 머리 꼭대기까지 사람들 차지다.
얼어붙은 사나사 계곡을 따라 걷다 보니, 용문산 정상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계곡과의 합수지점에 도달하고, 곧이어 사나사가 나타난다. 사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사나사는 용문산과 백운봉과 크지 않게 소박하게 지어져 주변 산과 계곡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나사를 지나 계곡을 따라 용천리 큰길까지는 걸으니 무려 1시간이 걸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평지길을 걷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용천리 큰길에서 양평행 버스를 기다리다가 빈 택시가 지나가 양평역으로 돌아오니 3시. 양평역을 원점으로 신들의 정원에 들렀다가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는데 6시간이 걸렸다.
양평역에서 녹색당원 산초님이 마중을 나와 시장통에서 회와 매운탕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예매한 기차표도 무용지물, 전철을 타고 청량리를 거쳐 아내와 뱃속의 앵두가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짧은 혼자만의 산행을 허락해 준 아내도 고맙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백운봉도 고맙고, 양평에서 반갑게 맞이해 준 산초님도 고맙다.
산행지 : 백운봉 (경기 양평, )
날 짜 : 2013년 1월
날 씨 : 맑음 (강추위)
산행시간 : 6시간 (9시 40분 ~ 15시 40분)
산행코스 : 양평 백운봉 휴양림 - 두리봉 - 헬기장 - 백운봉 - 함왕봉 능선 - 사나사 - 양평읍
일행 : 단독산행
교통 : 양평역(중앙선 기차), 양평역 -- 백운봉 휴양림(택시 이용)
[포토 산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