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2. 14. 19:15ㆍ산행일기
더불어한길에서 매년 겨울마다 먼 곳으로 정기산행을 떠난다.
올해는 벌써 명지산, 국망봉을 1박 2일로 다녀와서 설렘이 덜하지만, 그래도 덕유산의 설경을 상상하며 무주로 떠났다.
전날 설천면 가칠봉 아래 깊은골에 살고 있는 까마귀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무주구천동계곡으로 알려진 삼공 매표소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까마구의 도움으로(?) 시간을 많이 절약했지만, 백련사까지 가는 길은 약간 지루하게 느껴진다. 계곡의 날씨는 흐리기만 했지만, 머리 위쪽으로 바람소리가 사납게 느껴진다. 산 중턱은 구름인지, 안개인지, 눈보라인지 뿌옇게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4년 전 여름에 향적봉에서 백련사를 거쳐 이 계곡을 내려왔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주위 풍경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이거나, 계절이 바뀌어서 이거나, 아니면 내가 그때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백련사의 풍경은 어렴풋 기억이 났다. 약수터가 있다는 것도 기억이 났다.
[백련사]
가끔 눈이 날리더니, 백련사를 떠날때는 싸라기눈이 내린다.
조금씩 올라갈 수록 눈은 점점 많이 쌓여있고,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거칠게 느껴진다.
모두 아이젠을 했기때문에 그렇게 미끄럽지는 않다. 백련사에서 향적봉까지는 1시간 30분 코스다.
백련사에서 10시 56분에 출발했으니 정상적인 속도라면 오후 12시 30분쯤 도착할 텐데, 날씨가 안 좋으니 늦어도 1시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 여유가 많은것이 아니라서 자꾸 걸음이 빨라지고, 일행과 멀어지곤 한다. 눈 속에서 뒹굴고,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데, 나는 산행시간이 늦을까 봐 초조해하고, 함께 산행하는 사람들은 여유가 넘친다.
중간중간 많이 쉬면서 올랐는데도 12시50분, 드디어 덕유산 정상 향적봉(1614m)에 도착했다.
1500미터를 훨씬 넘는 향적봉에는 안개와 눈발이 거세게 날리고 있고, 좋지 않은 날씨에도
등산객들로 북적였다. 4년전 뜨거웠던 여름에 삿갓골재 대피소에서 올라올 때 힘들었던 것에 비하면 오늘은 비교적 쉽게 올라온 것 같다.
운동화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곤돌라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어차피
이용하라고 만들어진 시설인걸......다만, 국립공원 한쪽 능선을 모두 깎아버리고, 스키장으로
만들어버린 배후에는 오로지 돈돈돈, 개발지상주의자들, 건설족들이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정상은 눈과 안개로 어지럽다.]
향적봉 바로아래 대피소에는 정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취사장에는 발 디딜 틈이 없고,
야외 탁자에서 눈을 맞으며 밥을 먹는 사람들도 많다. 겨우 취사장의 탁자에 공간을 마련하여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뒤늦게 까마구, hey-u, 사노라면이 곤돌라를 타고 올라왔다.
대피소를 떠나기 전부터 눈발이 점점 거세어 지더니, 대피소를 떠날 때는 눈보라가 몰아친다. 배낭 속의 옷을 꺼내어 입을까? 말까? 갈등하다가 귀찮은 것도 있고 해서 그냥 출발했다. 대피소에서 중봉까지는 고산지대라 주목 군락이다. 심한 안개와 눈보라로 먼 경치는 보이지 않고 등산로 옆의 주목만 추위에 무감각한 듯 요동도 않고 서있다.
[향적봉에서 중봉가는길에 만난 주목들]
중봉에 도착하니 눈보라가 눈앞을 가린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다. 옷을 더 껴입었어야 하는데, 이제는 손이 시러워 장갑을 벗을 수도 없고, 도저히 옷을 입을 상황이 아니다.
누군가 '우리 돌아가야하는거 아냐?'라고 했지만, 다수의 의견을 처음 계획대로 직진하는 것이었다. 어떤 아주머니께서 혼자 고민하고 계시다가, 우리 가는 길에 같이 합류하신다.
중봉에서 내려오면서 부터는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가야 할 길이 많이 걱정됐다.
덕유산에서 조난당했다는 소식을 들은적은 없지만, 이 정도로 눈보라가 몰아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를 상황이다. 침착하게 시간을 아껴가며 가야한다.
될 수 있으면 일행과 같이 갈려고 했지만, 마냥 기다리며 속도를 맞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송계사 갈림길까지는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곤 했지만, 그 뒤로는 아주머니와 콩깍지와 함께 선두에 나서서 길을 찾아 걷는다. 조금 전에 반대방향으로 등산객들이 지나갔지만, 눈보라에 길의 흔적이 없다. 길옆 나뭇가지에 쌓인 눈은 허리를 넘어서는 곳도 있다.
지도에는 동엽령 도착하기 전에 안성 매표소(용추계곡) 갈림길이 있었지만, 그 길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동엽령까지 눈보라와 싸우며 내려갔다. 동엽령에 도착한 시간은 벌써 오후 4시 10분, 다행히 눈보라는 약해졌다. 안개도 걷히기 시작하더니 저 멀리 안성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아주머니께 스패츠를 해주고, 15분 정도 기다리니, 뒤처진 사람들이 모두 동엽령에 도착했다.
[동엽령에서 바라본 안성마을]
[산호 같은 눈꽃들]
매표소까지 1시간 30분인데, 서둘러야 할 것 같다. 동엽령에서 제일 뒤에서 출발했지만, 이내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라잡고 내려간다. 계단길이 계속되더니 중간 정도 크기의 바위길이 나타나고, 잔 바위길이 이어진다. 모두 눈에 덮힌길이라 조심하지 않으면 미끄러워 넘어지기 십상이다.
아주머니와 앞서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광주에서 바쁘게 살고 계신 아주머니는 녹색연합 활동에, 농사일에, 귀농학교에, 직장일까지 하신단다. 이 얘기 저 얘기하다 보니 통하는 면이 많다.
칠연폭포 입구에 오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그냥 지나쳤다. 칠연폭포 갈림길에서부터 다행히 산길은 끝났고, 매표소까지는 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다. 매표소 100미터 전에는 경사 급한 눈길이 있어서, 눈썰매로 먼저 내려온 아쉬움을 달랬다.
산행을 마친 시간은 17:50분. 예상시간보다 늦긴 했어도 다행히 더 어둡기 전에 매표소까지는 내려왔다.
'산행시간이 늦을 경우에 대비해 먼저 내려와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나은지? 어떤 일이 있어도 일행과 떨어지지 않고 함께 내려오는 것이 맞는지?'는 사실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계획단계에서 너무 늦지 않게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향적봉 대피소에서 중봉 동엽령까지의 거센 눈보라 때문에 고생이었지만,
앞으로는 덕유산 하면 그 살벌한 눈보라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잊지 못할 눈보라 / 4년 전에는 물 한 방울 없어서 고생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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