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 17. 01:05ㆍ산행일기
장마가 한창이던 7월 어느 날, 옆집의 큰 환호성에 나는 '오늘 축구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10년 이상 강원도 도민을 동원했던 올림픽유치는 짧은 순간 큰 환영을 받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동계올림픽을 유치해서 누군가는 면죄부를 얻었고, 누군가는 부귀영화를 누릴 테고, 또 누군가는 낙후된 강원도에서 올림픽을 치른다는 자부심을 가슴속에 새기며 살아갈 것이다.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기 이전부터 가리왕산 중봉 스키 슬로프는 자연환경을 파괴할 것이 확실했다. 환경단체와 시민들이 가리왕산 숲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동안 나는 마음으로 안타까워했지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늦었지만 불과 몇 년 후에 사라질 가리왕산 중봉 능선과 계곡, 풀과 나무들을 찾아보고 싶어서 가리왕산을 찾기로 했다.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내가 뭐 대단한 사상이나 생태주의로 무장된 사람인 줄 알겠지만, 나는 그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며칠 전부터 함께 갈 사람을 섭외했지만, 산행 계획이 급하고 거리가 멀어 결국은 나의 아내 나비와 그의 동료, 이렇게 3명이 가리왕산 원정을 나서게 됐다. 광복절 연휴를 끼고 1박 2일 산행을 계획했으나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당일 산행으로 계획을 바꿨다.
밤새 잠을 설치고 아침 7시 서울 집을 나서 중간에 아내 동료를 태우고 정선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이른 시간인데도 고속도로가 막혀 국도로 돌아가다 보니 산행의 기점인 가리왕산 장구목이골 입구에 11시 20분이 되어서야 도착한다.
일요일을 맞아 장구목이골 입구에는 이미 많은 차들이 서 있다. 방금 전 도착한 산악회 버스에서 내린 단체손님이 우루루 산으로 들어가고 있다. 우리도 얼른 배낭을 다시 꾸리고 장구목이골로 들어서니 계곡물이 내뿜는 차가는 기운이 얼굴과 목에 달라붙는다. 산에 들어서 10분여 동안은 계곡 오른쪽 길을 걷게 되는데, 장구목이골 계곡의 폭포와 계류는 잡목 숲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10분 만에 만나는 낮은 폭포가 있는 계곡으로 내려서니 지금까지 보다 더 차가운 산 기운, 청량함이 느껴진다.
여기에서 조금 더 오르면 나무다리로 계곡 왼쪽으로 건너게 되고 이제부터는 계곡을 건널 일은 없다. 계곡을 오른쪽에 두고 오르는 길은 매우 습해서 더운 날씨는 아니지만 어느새 온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계곡 물은 시원해 보이지만 내려갈 수가 없다. 다행히 20여분을 오르면 계곡과 등산로가 가까워지고 이제는 계곡과 많이 떨어지는 일은 없으니 더울 때마다 잠시 땀을 씻을 수 있다.
2년 전에 이맘때 홀로 가리왕산을 올랐던 나는 이끼를 보면서도 느긋하게 산행을 했지만, 아무래도 일행 2명은 가리왕산을 처음 찾는 것이라 산행속도는 느리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가리왕산에서만 볼 수 있는 계곡을 덮은 이끼와 계류와 폭포가 만들어 내는 물안개, 원시림과 고사리류가 조화를 이룬 신비한 숲 속 풍경에 정신을 팔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교적 낮은 고도인데도 벌써 주목나무가 여기저기 눈에 들어오고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20분가량 지나면 장구목이골 계곡의 수원지를 만날 수 있는데, 이 수원지는 장구목이골 계곡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함이 있다.
장구목이골 계곡은 다른 산의 계곡처럼 작은 물줄기가 모여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곳 수원지의 바위틈에서 엄청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며 곧바로 넓은 계곡이 시작된다. 멀리서 보면 가리왕산이 거대한 육산이긴 해도 산속은 워낙 너덜지대가 많다 보니 돌 틈으로 물이 스며들어 이런 신비한 광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계곡 최상류 수원지를 지나면 물소리가 싹 사라지는데, 이번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작은 물줄기 하나는 조금씩 흐르고 있다. 그 물줄기 옆에서 주먹밥과 과일로 허기진 배를 달랜다. 밥을 먹고 주위를 한번 더 둘러보며 업무상 백두대간등 산을 많이 찾는 일행은 각종 식생들이 잘 어울려있는 가리왕산 숲에서는 제주도 곶자왈 혹은 규슈 남쪽 섬의 삼나무 숲과 같은 원시림의 분위기가 난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20여분 더 오르면 임도가 나타나는데,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지정 안내판이 있다. 하지만, 중봉 스키 슬로프 예정 구역은 정부가 특별법을 만들어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을 무력화시킬 예정이라고 얘기가 들리고 있다.
임도를 가로 질러 바로 가리왕산 정상(상봉)을 향해 치고 올라간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경사가 꽤 급한 길이 시작되어 힘든 길이긴 해도 이끼와 고사리류, 여름 야생화가 곳곳에 피어 있다. 지금까지는 힘들어하지 않고 올라가던 아내도 가파른 길을 올라가며 점점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 다행히 주위의 신비한 형태의 돌과 아름드리 참나무, 잣나무가 만들어내는 조화, 그리고 다시 여기저기서 눈에 띄는 주목나무를 보고 힘을 얻는다. 주목나무가 제법 눈에 많이 띄고, 경사도 완만해질 무렵인 해발 1200미터 지점에서는 제법 많은 수량을 뿜어내는 샘물이 있다. 샘물 근처에서 어떤 야생동물의 배설물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낮에는 사람들이 이용하지만, 밤에는 높은 곳에 사는 동물들에게는 이 샘물이 사막의 오아시스나 다름없을 것이다.
샘에서 20여분을 더 가면 정상(상봉)-중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다다르고 이어 5분 만에 드디어 해발 1561미터의 가리왕산 정상에 도착한다. 중간에 점심을 먹긴 했지만, 계획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가리왕산 정상은 강원도 고산답게 넓은 초원과 키 작은 잡목이 어우러져 있지만, 짙은 안개가 끼어 있어서 주변 산과 계곡의 조망은 거의 볼 수 없다. 강원도 정선과 평창의 높은 산들 가운데서도 우뚝 솟은 가리왕산에 맑은 날 오르면 저 멀리 북쪽의 동대산부터 시작하여 청옥산, 두타산, 태백산, 함백산, 멀리 단양의 소백산까지 백두대간이 모두 조망되고, 서쪽으로는 원주의 치악산과 태기산, 청태산을 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을 자랑한다. 실제로 지난 2009년 여름에 이곳에 올랐을 때는 멋진 조망을 한 없이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먼 조망 대신 이런 안개 혹은 구름 속의 정상에서 시원함을 맛보는 것도 나름 여름 산의 묘미이다.
정상 풀밭에 앉아 시원한 산바람을 쐬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30분이 훌쩍 지나간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더 늦어지면 안 되기에 하산을 한다. 시간은 어느덧 4시를 향해 가고 있다. 정상에서 중봉까지 가는 길은 능선에 어울리는 참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곳곳에 동자꽃, 쥐손이풀 등의 야생화가 피어있고, 물기가 많은 길이 이어지는데 이런 여름 산의 능선을 밟아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해발 1433미터의 중봉까지 고저가 심한 길일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능선 길만 40분 따라가니 중봉 안내표지판이 나왔는데, 상봉과 달리 중봉 정상은 숲이 우거져 있다. 등산객들이 만들어 놓은 듯한 사람 키 높이의 돌탑 위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우리는 중봉을 지나 하봉 방향으로 가다가 남녀활강 슬로프가 만나게 될 성황골로 바로 가려고 했으나, 10여분 가다 보니 길이 희미하여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중봉으로 올라와 중봉에서 숙암분교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했다. 지금 내려가는 이 길, 그러니까 중봉 바로 아래 해발 1420미터 지점에서 동계 올림픽 스키 슬로프가 시작되어 개탕말골 상류를 지나 성황골로 이어진다.
갑자기 미래의 어느 날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이번에 S전자에서 새로 개발한 슈퍼 초고화질의 티브이 화면으로 스키 활강경기가 중계된다. 각국의 국가대표 스키선수들은 출발 신호와 함께 하얀 슬로프를 빠르게 내려간다. 멋진 점프를 하고 방향을 틀며 눈보라를 휘날리고, 점점 더 빠른 속도를 내며 미끄러져 내려간다. 티브이 앞에 앉은 사람들은 슬로프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가리왕산 숲의 설경에 감탄한다.
하얀 눈을 뒤집어 쓰고 홀로 서 있는 멋진 주목도, 선수들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그 슬로프도 원래는 더 많은 주목과 참나무, 자작나무, 소나무가 우거진 숲이었고, 이끼와 야생 들풀, 산새와 동물들이 살던 곳이라는 사실을 전혀 연관시키지 못한 채.......'
아찔한 생각이 산신령에게 전해졌는지, 갑자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한다. 어젯밤 비옷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은 것이 후회된다. 급한 대로 아내가 가져온 윈드재킷과 우산으로 비를 피하며 조심스레 하산을 한다. 중봉에서 능선을 따라 내려가던 길은 개탕말골 상류를 지나 자작나무가 잘 가꿔진 오잠동 임도로 이어진다. 여름철 높은 산 정상에서 흔하게 만나는 소나기는 서서히 그쳐 간다. 오잠동 임도에서 등산로 표지판을 따라 다시 숲 속으로 들어서 내려갔더니 이번에는 산림청에서 가꾼 낙엽송 숲과 소나무 숲이 이어진다. 숲을 지나 임도가 나오길래 이제 다 왔나 싶었더니 아직도 맞은편 백석산과 높이를 나란히 하고 있다. 험한 길은 아니지만, 이미 몇 시간째 산행을 하고 있어서, 일행 모두 발목이며 무릎이 욱신거린다고 한다. 시간은 오후 6시를 훌쩍 넘었다. 임도 갈림길에서 조금 쉬었다가 바로 출발한다. 이제는 (구) 숙암분교와 주변 마을이 눈에 보였지만, 마지막 30분은 오늘 산행에서 가장 험한 코스로 로프를 여러 번 사용하게 된다. 농가를 앞에 두고 마지막 너덜지대를 통과하여 예전에 숙암분교가 있던 마을에 도착하여 긴 산행을 끝낸다.
이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폐교는 무엇을 의미할까? 예전에는 이곳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초등학생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현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지금의 집에서 쫓겨나더라도 스키 슬로프가 생기고, 각종 숙박시설들이 들어서는 것을 환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숙암분교 앞에서 친절한 가족이 차를 태워줘 장구목이골 입구까지 이동하여 차를 가지고 정선 읍내에 나가 곤드레 나물밥으로 만찬을 하고 서울로 돌아오니 새벽 2시가 되었다. 예상한 것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긴 했어도 알찬 산행을 한 하루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가리왕산을 찾고, 중봉 능선을 찾아서 결국 스키장이 생기더라도 우리가 지금 무슨 일(짓)을 하고 것인지는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산행지 : 가리왕산 (1561m, 강원도 정선, 평창)
날 짜 : 2011년 8월 14일
날 씨 : 구름 많음 (소나기)
일 행 : 맑은물, 나비, 나비 동료
코 스 : 장구목이골 - 가리왕산 정상(상봉) - 중봉 - 오장동 임도 - (구) 숙암분교
산행시간 : 8시간 (11:20 ~ 19:20)
교 통 : 승용차 (서울- 진부 IC-가리왕산 : 정선읍-평창-새말 IC-서울)
[포토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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