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30. 23:14ㆍ전국산행일기
산에 띄엄띄엄 가다 보니 '오랜만에 산행'이라는 말이 익숙해졌다.
요즘 나에게 산행이란? 산을 오르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고,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산행을 한다.
'봄이 가고 여름이 되어 산은 푸르게 되었으니, 한 번쯤 산에 가야 하지 않겠냐?'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예지자의 목소리인지, 내가 만들어낸 환청인지 모르지만, 그 소리를 따르기로 한다. 토요일 아침 아직 잠들어 있는 도시를 떠나 경기도의 가장 북쪽인 포천군 이동면의 각흘산으로 떠난다. 조금 서둘러 집을 나섰더니 다행히 서울을 빠져나가는 길은 막히지 않는다.
47번 국도를 타고 포천시 이동면에 도착하여 각흘산 입구를 찾으려 하였으나 안내판은 없고 산은 비슷하다. 지도를 봐도 각흘 산을 찾을 수 없고, 출발 전에 미리 조사하지 못한 것을 뒤늦게 후회한다. 북쪽으로 천천히 올라가다 보니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인 자등령이 나왔다. 자등령에서도 각흘산을 오를 수 있지만, 나는 원점회귀 산행을 위해, 각흘계곡으로 돌아와 계곡가 공터에 차를 세워놓고 산행을 시작한다.
각흘계곡 입구의 펜션과 식당 마당을 피해, 계곡으로 내려가 물을 따라 걷는다. 어딘가에 등산로가 있을 테지만, 6월 각흘산 계곡은 숲이 우거져있고, 벌레들도 많아도 원시림 분위기다. 계곡을 따라 더 올라가 보니 캠핑장이 보이는데, 자등령 쪽에서 이어진 길을 따라 가족단위의 이른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
캠핑장을 지나서도 이어지는 계곡 길은 여느 등산로처럼 넓지는 않지만 뚜렷하여, 나는 계속 계곡을 따라 걸었다. 작은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은 물을 건널 수도 있고, 작은 바위를 올라가야 하지만 힘든 길은 아니라, 혼자 사색에 빠져서 걷는데, 정신이 바짝 들게 한 일이 생긴다. 내가 걷는 방향 쪽 바위 위에서 일광욕을 하다가 황급히 피신하는 뱀을 만난 것이다. 더 정신을 놓고 걸었더라면, 어쩌면 뱀과 직접 대면하는 상황을 맞이했을 수도 있겠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가는데, 잠시 후 물을 건너던 참에 반짝이는 흙갈색 뭉치가 보인다. 으아악! 두 번째 만나는 뱀이다.
계곡 길이라서 뱀이 많은가 하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산길로 접어드는데, 등산로에서 잡목 숲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뱀... 심장 박동수가 높아진다.
20분에 뱀 3마리의 출현 빈도라면, 오늘 산행하면서 만나게 될 뱀은 수십 마리? ㅠ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마른나무 작대기를 하나 들고 조심조심 앞으로 나간다.
계곡 옆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니 뱀을 생포하려는 것으로 보이는 그물이 길게 늘어져 있다. 가을에 계곡의 뱀이 숲으로 겨울잠 자러 갈 때 잡는 용도인 듯한데, 각흘산에 뱀이 많다는 증거인 것 같다. 회갈색 덩굴식물과 휜 나뭇가지만 봐도 뱀처럼 보여 거의 멘붕상태에 이르렀지만, 다행히, 계곡과 함께 가는 길을 끝이 나고, 가파른 길이 나온다. 푸석푸석한 토양에 풀보다는 굵은 나무들이 많으니 이런 곳엔 뱀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초반에 긴장을 많이 해서 그런지, 가파른 길을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힘이 빠지고 힘들다. 정상에서 점심을 먹으려던 계획이었는데, 적당한 그늘을 찾아 아내가 싸준 점심을 먹고 출발했더니, 불과 50미터 앞이 주 능선이었고, 주능선에 오르니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정상이 보인다.
각흘산 주능선은 인근 군부대의 폭격장과 이어져 있어, 하얀 모래흙 살을 드러내고 뜨거운 햇빛을 그대로 받고 있다. 전쟁과 긴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젊은이들이 군대로 가야 하듯, 어쩔 수 없는 희생을 각흘산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연민이 느껴진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예쁘게 핀 나리꽃을 보면서, 폭격이 멈춰서 다른 산처럼 초록 피부를 갖게 되길 희망해 본다.
각흘산 정상은 산안개가 시야를 흐리게 하고 있지만, 동쪽으로 한북정맥 광덕산 일대, 남서쪽 명성산, 서쪽의 용화저수지 등 조망은 좋다. 하지만, 뜨거운 태양을 피해 피해 나는 정상 동쪽 아래의 참나무 숲 속으로 들어간다. 정상 서쪽의 나무는 모두 베어냈지만, 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참나무 숲이 우거져있고, 산새들의 노랫소리도 그치지 않고 들을 수 있다. 바람소리, 나뭇잎 소리, 산새 소리의 조화는 6월 능선길에서 들을 수 있는 기쁨이다.
능선을 내려와 다시 계곡 상류로 내려오니, 꿈틀거리는 악몽이 떠올랐지만, 돌아갈 길은 없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올랐던 길을 내려가는데 다행스럽게도 뱀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못 보고 지나친 것을 수도 있는데, 알고 불행할 바에는 차라리 모르고 행복한 경우가 나을 수도 있다.
오를 때 지나쳤던 캠핑장 앞마당을 통해 내려가는데, 주인이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온다. 사유지라서 밟으면 안 된다나?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있나?
우선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계곡을 막고 통행하는 등산객들에게 시비 거는 것도 우습고, 계곡 깊은 곳을 사유재산으로 팔아먹고, 그곳에 캠핑장을 허가해 준 포천군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백변 양보해 계곡 옆 땅은 사유지일 수 있다 해도, 계곡은 하천부지(?)로 절대 사유지가 될 수 없는 곳이다.
잠깐 실랑이가 있었지만, 오래 얘기할 것도 아니고, 대충 마무리 짓고 물러난다.
마지막 눈살 찌푸릴 일이 있었지만, 청량함과 원시적인 느낌이 좋았던 6월의 각흘산 산행은 유쾌함으로 결론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산행지 : 각흘산 (838m, 경기 포천, 강원 철원)
날 짜 : 2012년 6월 24일(일)
날 씨 : 맑음 (옅은 구름)
산행시간 : 4시간 50분 (10시 20분~3시 10분)
산행코스 : 각흘계곡 입구 다리 - 각흘계곡 - 정상 바로 옆 남서 능선 - 정상 - 동쪽 능선 - 각흘계곡 - 입구
일 행 : 단독산행
교 통 : 자가용 이용
[포토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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