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1. 02:11ㆍ북한산국립공원
매년 12월에는 연차가 남곤 한다. 일 때문에 제때 쓰지 못해서, 혹시 모를 경조사나 병원진료, 육아 예비용 등 각자 다른 사유가 있다. 쓰지 않으면 사라질 연차를 쓰기 위해 한길 친구 홍과 북한산에 가기로 했다. 사회적 거리유지 때문에 소규모 산행도 눈치 보이는 세상이 됐다.
아이를 등교시키고, 약속시간 10시 30분에 구기터널 입구 삼성출판박물관 입구에 도착한다. 약속시간을 잘 지키는 친구가 오늘은 버스를 헷갈려해서 30분 늦게 도착한다. 산행을 앞두고 마음이 여유로워져 개의치 않고 같이 구기계곡 입구로 향한다.
계곡으로 들어가 주위를 보니 예전에 구기계곡에 왔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2012년 녹색당 창당 초기에 왔었고, 아이가 태어난 2013년에는 먼 곳으로 여름휴가를 가기 어려워 구기계곡 중간까지 왔었다. 당시에 엄마, 아빠 품에 안겨 다니며 말을 못 하던 돌 안 지난 아이가 계곡에 오니 되게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오랜 추억도 떠오르고 작지만 잘 보존되어 있는 구기계곡 경관도 우수하여 기분이 좋다. 평일이라 등산객이 많지도 적지도 않다. 홍과 둘이 산행하는 것은 처음인데, 그러잖아도 각박했던 사회가 코로나-19로 더 단절된 사회가 되었으니, 둘은 수다쟁이가 되어 끝없이 대화를 나누며 올라간다.
구기계곡 중간쯤 승가사 갈림길에서 왼쪽 비봉능선대신, 문수사 방향으로 향한다. 이곳부터는 처음 가는 길이다. 작은 물줄기가 꽤 오랫동안 이어지는 구기계곡 상단을 지나 약간 가파른 길을 올라섰더니, 아래쪽 전망이 비로소 트인다. 짧게 숨을 돌리고는 조금 더 올라 깔딱 고개를 넘으니, 눈앞에 문수봉과 보현봉 절경이 펼쳐진다. 왼쪽 문수봉과 이어지는 능선의 기암괴석들과 오른쪽 보현봉의 웅장한 모습이 대단하여 한참을 올려다본다. 설악산 어느 계곡에 온 것 같다.
걸음과 수다를 반복하며 이어가다 보니, 문수봉 바로 아래 위치한 문수사에 도착한다. 구기계곡 코스는 완만한 경사로 이어져 문수사까지 힘들지는 않았다. 문수사 대웅전에서 맞은편 보현봉과 구기계곡을 내려다보니 가슴이 크게 웅장해진다. 대웅전의 본뜻과 무관하게 오늘은 '크게 웅장해지는 곳'으로 해석한다.
대웅전 옆의 문수동굴은 원래 자연동굴이었던 곳을 법당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불심이 없는 내게도 영험한 종교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다.
문수사에서 대남문까지는 완만한 바윗길을 조금만 오르면 된다. 대남문에 오르니 북한산 정상 백운대 일대 봉우리들이 보인다. 대남문 위 성곽에 올랐다가, 곧바로 북한산성을 따라 문수봉으로 향한다. 홍도 힘들지 않아 하고, 대략 산행속도가 비슷하다. 문수봉 표지석이 있는 정상(해발 727m)에 오르니 주변이 시원스레 뚫려있다.
이전에 문수봉에서 내려보았던 구기계곡은 북한산의 여러 계곡 가운데 하나였는데, 걸어 올라온 구기계곡을 내려다보니, 훨씬 친숙한 느낌이 든다. 생각과 경험의 차이다.
문수봉 북서쪽 계곡너머로 백운대, 망경대는 늘 그렇듯 멋진 모습을 뽐내고, 그 사이로 인수봉 정상이 뾰족하게 보인다. 시계방향으로 북한산성 능선, 보현봉, 남쪽으로 서울 시내, 남서쪽으로 비봉능선이 뻗어나간다. 서쪽 바로 앞 봉우리는 출입금지 구역인 진짜 문수봉 정상이다.
조망은 좋지만 바람이 차갑고 구름이 슬금슬금 해를 가리기 시작하여, 체감온도가 낮아진다. 10여분 전 문수사는 분명 봄날처럼 따뜻했는데, 겨울산 날씨는 예측불가하다.
문수봉에서 느긋하게 산 기운을 받고 있는데, 업무 관련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온다. 스트레스가 밀려와 전화를 안 받으려다 받았더니, 통화시간이 길어지고 함께 산행하는 친구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그러는 사이 구름은 더 많아지고, 체감기온은 더 낮아지고 있어, 비봉능선을 따라 승가사로 통해 구기동으로 돌아가는 원점회귀 산행을 하기로 한다. 문수봉 아래에서 바람을 피해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는데, 짧은 시간에 차갑게 변한 산바람이 부담스럽다. 게다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바로 옆에 앉아서 빤히 쳐다보는 산고양이의 시선도 부담스럽다. 옆으로 계속 지나다니는 등산객들도 부담스럽다.
점심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경사진 바윗길로 5분을 내려가니, 문수봉 최대 난코스 험한 바윗길이 나타난다. 십 수년 전 여름, 철 난간과 로프도 없어 덜덜 떨면서 이 코스를 올랐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난간과 로프가 있어서 위험하긴 해도 보통 수준의 등산객이라면 조심해서 지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10월에 갔던 의상능선 보다 여기가 더 위험해 보이지만, 직접 내려가보니 스릴 만점이다. 비봉능선과 삼천사 계곡등 주변도 확 트여있어서 산행할 맛이 난다. 바윗길을 내려와 뒤돌아 보니 엄청난 경사에서 아찔함이 느껴진다.
바윗길과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비봉능선을 따라 걸으니, 자연적으로 생겼다는 바위문, 동천문에 도착한다. 문수사 가는 길을 물어보는 어르신들에게 소요시간을 알려줬더니, 하산하겠다고 하셔서 불광동으로 내려가는 길을 알려 드린다. 그리곤, 또 업무 관련 전화가 걸려와 동천문 전망대에서 한참 시간을 허비한다. 평일 연차는 50% 할인율이 적용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으나, 세상 일은 나를 가만 두지 않고 빨아들인다.
동천문에서 또 다른 산고양이를 보내고, 다시 오르락내리락 비봉능선을 걷다 보니, 멀어 보였던 사모바위가 눈앞에 있다. 평일이라 사람이 없고, 탁 트인 야외의 전파 가능성음 없는데, 일부 언론의 공포 기사가 여론이 되어 코로나 거리두기 현수막이 곳곳에 붙어 있다. 모든 시민들이 공동체를 위한 선의를 가지고 대응하는 일이지만, 산에까지 온통 거리두기 안내라니....
처음 가는 낯선 산에서 길을 잃기 쉽듯, 처음 찾아온 판데믹에 방역이 길을 잃은 듯하다.
사모바위를 지나 승가사 방향으로 내려선다. 이후 사찰도로를 따라 건덕빌라 뒤 승가매표소로 하산하여, 산행출발지 구기동으로 돌아온다.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추운 날 산행을 하였지만, 코로나 거리두기 기간이라 뒤풀이는커녕 가벼운 차 한잔도 불가능하다. 호~옹과 다음 산행을 기약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구기계곡의 매력을 새삼 알게 된 산행이었다.
산행지: 북한산 문수봉(727m) / 서울 종로, 고양시
날 짜: 2020년 12월 11일
날 씨: 맑음 (구름 조금)
일 행: 2명 (맑은물, 호~옹)
산행코스: 구기동 현대빌라 정류장 - 구기통제소 - 구기계곡- 깔딱 고개 - 문수사 - 대남문 - 문수봉 - 사모바위 - 승가매표소(건덕빌라)
산행시간: 6시간 10분 (11시 00분 ~17시 10분)
교 통: 서울시내에서 구기동행 버스 이용
[사진으로 보는 산행기]
























'북한산국립공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른 아침 북한산 칼바위 능선 산행 (2021.1.31) (0) | 2021.01.31 |
---|---|
크리스마스 아침의 붉은 일출, 북한산 형제봉 (2020.12.25) (0) | 2020.12.25 |
가족 산행하기 좋은 북한산 형제봉 (2020.10.17) (0) | 2020.10.18 |
북한산 최고 능선 의상능선 '의상봉-용혈봉-나한봉-문수봉' (2020.10.11) (0) | 2020.10.12 |
오랜 산행친구들과 재회, 하지만 애벌레 악몽을 만난 북한산 (2020.5.30) (0) | 2020.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