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12. 00:10ㆍ북한산특집
한글날과 주말이 이어지는 3일 연휴가 생겼다. 코로나 시대라 여행보다 산행할 친구를 수소문하였으나 실패하여, 연휴 마지막 날 혼자 북한산에 가기로 한다. 기왕 가까운 산에 가는 거, 아직 가보지 않았던 의상능선을 넘어 보기로 한다.
일요일 오전, 북한산 아래 서울 정릉에서 고양시 북한산성 입구까지 버스로 이동하는데 1시간 20분이 걸린다. 북한산 국립공원을 1/3 돌아가는 거라 멀다. 10년 만에 북한산성 입구 정류장에 내려보니 예전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주변이 정리되어 있다. 깔끔하게 정리된 상가가 낯설게 느껴져 오히려 먼 산행을 떠나온 것 같다.
북한산성 입구 매표소와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분소를 지나 의상봉 갈림길로 오른다. 짧은 숲길이 끝나고 시작된 바윗길은 적응할 여유도 주지 않고 급하기 기울어진다. 오랜만에 가파른 바윗길을 오르니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진다. 몇 달 전부터 팔에 통증이 지속되고 있지만, 난간 손잡이, 밧줄, 바위를 잡은 팔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조금 오르다 보니 등산화 접지력도 적응되고, 가파른 바윗길에 대한 현기증도 사라진다. 혼자 긴장하여, 쉬지 않고 올랐더니 숨이 차지만, 사방이 확 트인 조망을 보니 산행하는 맛이 느껴진다. 오르는 방향 왼쪽 북한산성계곡 건너편으로 원효봉-노적봉이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펼쳐진 계곡과 암릉은 은평구와 고양시의 아파트 단지로 이어진다. (산행을 끝내고 복기하며 의상능선 남쪽 계곡과 능선이, 삼천사 계곡, 비봉능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북적이며 사진을 찍고 있는, 재미난 모양의 (쌍)토끼바위를 지나고, 이어지는 동물 모양 바위를 지나 긴 계단을 오르니 어느새 의상봉 정상(해발 501m)이다. 북한산성 입구를 떠난 지 대략 1시간 만이다. 의상봉 정상에서는 북한산 원효봉-백운대-노적봉이 더 가까이 보인다. 파란 가을 하늘은 아니지만, 조금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동서남북 북한산 조망은 최고다. 의상봉 정상 주변에는 조금씩 물들어가는 단풍도 보이고, 멀리 보이는 봉우리들은 이미 초록색을 잃어버렸다. 산에 오면 계절을 제대로 만난다.
의상봉 정상을 지나려는데, 귀에 익은 아이 목소리와 어른들의 칭찬 소리가 들려 봤더니, 딸아이의 친구가 있다. 아이도 나를 발견하고 놀라는 표정이다. 옆으로 다가갔더니, 가족과 함께 의상봉에 올라왔다. 바윗길이 험한 이 산을, 아빠 엄마 어린 동생과 함께 올라온 것이다. 부모님도 아는 사이인데, 산에서 만나니 되게 반갑다. 이 넓은 서울에서, 그것도 산에서, 무엇보다 다소 난이도가 높은 의상봉 정상에서 지인 가족을 만난 것은 보통일은 아니다. 의상봉 정상에서 가사동암문까지 바윗길을 20분 정도 같이 내려간다. 의상능선을 넘어 봤다는 아버님에게 산행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고, 가사동암문에서 안전한 산행을 기원하며 헤어진다.
가사동암문에서 용출봉 오르는 길은 가파른 바위길이지만, 이미 높은 고도에 올라와 있어 의상봉 길 만큼은 힘들지 않다. 게다가 이어지는 기암과 주변 풍광 덕분에 힘들지 않게 용출봉 정상에 오른다. 할미바위도 보고, 바윗길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용혈봉과 증취봉 정상을 차례로 지난다. 다소 험한 길이 있긴 하지만, 의상 능선은 샛길로 빠지지만 않으면 험하지 않고, 줄곧 백운대-만경대-노적봉과 의상 능선, 비봉 능선의 풍광을 수시로 볼 수 있다.
전망 좋은 바위 곳곳에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나는 의상능선은 험하다는 인식 때문에 이제 서야 찾아왔는데, 의상능선의 멋진 풍광을 알고 있던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증취봉을 내려서니, 성곽 복원공사 현장이 나온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고려시대 쌓은 중흥산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조선시대 쌓은 북한산성이 아닌, 고려시대부터 북한산에 산성이 있었다면, 어쩌면 더 오래전에도 서울 서북쪽과 고양시 일대의 농경지, 구릉을 두고 여러 세력의 권력다툼이 있었을 것이고, 주변에서 가장 높았던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와 능선은 그 다툼에서 실질적인 역할과 상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하지만, 농경지나 삶의 터전과 멀리 떨어진 산에 산성을 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성곽 복원 현장과 안내글을 봤더니, 문화재, 유적지 발굴 복원 현장이 계속 눈에 들어온다. 북한산성의 초소건물 '성랑'이 있었던 성랑지, 성곽 위에 적을 관측하고 방어하기 위해 쌓은 얕은 담장인 '여장', 이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대성문에서 대동문까지 복원된 북한산성은 지나치게 깔끔하여,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모르다 보니 감흥이나 관심이 없었는데, 이렇게 작은 역사의 현장을 복원하며 설명이 잘 되어 있으니,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북한산성에 대한 상상력도 자극되고 관심도 생긴다.
부왕동암문 부근에도 유적지 발굴 현장이 있는데, 이곳을 지나 나월봉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북한산 초등학교에서 의상봉 정상 오르는 길이 고도차가 크고 험했지만, 나월봉 오르는 길을 의상봉의 깔딱 고개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오르막이 이어진다. '그래 봤자 설악산 깔딱 고개도 아닌데 얼마나 힘들겠어?'라는 생각으로, 길게 이어진 오르막을 오르니 다시 트인 북한산 조망을 만난다. 곧이어 나월봉 정상 갈림길이 나오는데, 나월봉 정상은 안전사고 위험을 이유로 통제한다는 안내판이 있다.
나월봉 우회길로 돌아가다가 단풍이 아름다운 암릉이 보이는 전망대가 있어 가볍게 점심을 먹는다. 울긋불긋 물든 암릉은 남장대(산성 동장대와 같은 지휘통제소)다. 멀리서부터 이곳, 남장대 단풍이 눈에 띄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더 아름답다. 충분히 쉬었다가, 다시 나월봉 우회로 암릉과 소나무 길을 지나 나한봉으로 향한다.
나월봉과 나한봉 주변은 의상능선 중에서도 풍광이 최고다. 고도가 높아, 단풍이 붉다. 높은 만큼 북한산 정상부 조망, 삼천사골, 비봉능선, 무엇보다 지금까지 올라왔던 의상능선의 여러 봉우리들이 뒤로 펼쳐진다. 715봉 오르는 바윗길까지 멋진 조망은 계속 이어진다. 715봉은 의상능선과 남장대 능선이 만나는 봉우리인데, 휴일인데도 발굴 혹은 문화재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힘든 일이지만 의미 있는 일이 부러운 요즘이다.
잠시 남장대 능선 방향으로 10여 미터 갔더니, 의상능선, 삼천사 계곡, 북한산 계곡, 백운대-만경대를 모두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가 나타난다. 북한산 도시 옆에서 늘 그 자리를 지키며, 고생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새삼 고마움이 느껴진다. 북한산성을 지킨 수많은 인간 장수들보다, 북한산이 바로 오랜 자연사에 남을 훌륭한 장수가 아닐까?
남장대 갈림길에서 내려서니 바로 청수동암문이 나타난다. 비봉능선에서 문수봉을 오르는 위험한 구간 우회로가 의상능선을 만나는 곳이다. 단풍과 가을 풀, 가을 야생화가 피어 완전한 가을이 된 길을 10여분 갔더니 바로 문수봉 정상이 나타난다. 비봉능선, 보현봉, 북한산 정상부, 멀리 도봉산까지... 나에게는 이 풍광을 초월하는 언어가 없다.
문수봉에서 한길 친구들에게 잠시 라이브 중계라는 걸 해보고, 대남문을 향해 내려간다. 언젠가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불던 대남문의 가을은 따사롭다. 북한산성을 따라 보현봉 갈림길이 있는 잠룡봉을 지나 대성문으로 향한다. 의상능선에 비하면 부드러운 길이라 그런지 연인들과 운동하듯 나선 등산객이 간간이 눈에 띈다. 대성문 누각 마루에서 산들바람과 단풍을 보며 한참을 쉬다가 형제봉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조금씩 내려갈수록, 붉었던 나뭇잎이 다시 초록이 되니 내가 산을 내려가는 것인지, 계절을 거슬러 가는 것인지 헷갈린다.
대성문에서 일선사까지 잠룡봉 보현봉 아래 구간에는 지난여름 거센 폭우와 태풍의 흔적이 남아 있다. 흘러내린 바위 덩어리의 흔적, 정릉천 발원지 최상단 계곡에 많은 물이 흘렀던 흔적, 쓰러진 나무들. 산도 바위도 나무도 고생한 여름이었다. 그것이 비록 자연의 운명일지라도.....
일선사 아래 갈림길에서 형제봉 능선을 벗어나 영추사 방향으로 내려간다. 영추사 위 전망대에 올라 바라본 정릉 청수계곡은 북한산 다른 계곡에 비해 펑퍼짐한 게 푸근해 보인다. 등산객에게 한방차와 물을 나눠주던 영추사 물통은 코로나 방역에 밀려 보이지 않는다.
영추사 부근부터 딱따구리 소리를 방해하며 큰 소리로 노래 부르던 어떤 중노년, 외국말로 노래할 정도면 공부 좀 하고, 어딘가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을 거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가까운 거리에서 쌍욕을 섞어가며 노래를 한다. 시대를 비판할 수 있지만, 정치 경제와 사회과학 지식과 품격이 초등학생 고학년 만도 못한 추한 사람이 많은 요즘이다.
끊임없이 산에 도전하는 중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건강식품을 챙기는 만큼, 건강 지식을 챙기는 중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공해가 될 것인가? 바람이 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걸음을 빨리하여 소음공해에서 벗어나 청수계곡을 만난다. 지난여름, 계곡물이 넘쳐흐르던 청수계곡은 이제 작은 실개울이 되어있다. 청수계곡 아래로 내려오니, 지난 9월 초 태풍에 쓰러진 참나무, 아카시 나무들이 생각보다 많다. 청수교 2교를 지나 익숙한 산책길을 따라 정릉 탐방 안내소에 도착하는 것으로 산행을 끝낸다.
버스로 이동하여, 산을 넘어 제자리로 돌아온 이상한 원점 산행이었다.
산행지: 북한산 의상능선 (최고봉, 문수봉 727m, 경기 고양, 서울)
날짜: 2020년 10월 11일
날씨: 흐림
산행코스: 북한산성 주차장(고양시 효자동) - 의상봉(502m) - 가사당암문 - 용출봉(571m) - 용혈봉(581m) - 증취봉(593m) - 부왕동암문 - 나월봉(651m) - 나한봉(688m) - 청수동암문 - 715봉 - 문수봉(727m) - 대남문 - 대성문 - 영취사 - 정릉탐방지원 센터
산행시간: 5시간 50분 (11:25~17:15)
일 행: 나 홀로 산행
교 통 : 고양시 효자동 북한산성 입구 704번 버스 이용
[사진으로보는 산행기]
의상봉 - 문수봉 - 대성문 - 청수계곡 산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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