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19. 12:22ㆍ북한산특집
#입산금지 - 입으로만 하는 산행을 금지당하다
가족 중에 아이가 있으면 주말 산행보다,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이 더 재미있고 보람차다. 그럼에도 산에 가고 싶어 질 때가 있는데, 산행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가끔은 일상을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항상 긴장해야 하는 도시 삶을 벗어나고는 싶지만, 딱히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는 어려울 때 오래된 취미, 산행이 떠오른다.
그래서 가끔 아내에게 '이번 주말에 산에 가도 돼?'라고 허락을 구했고, 실제로 몇 번은 허락을 얻었다. 그러나 막상 주말이 되면 집을 나서기 못하고 일상에 빠져 지낸다. 몇 주 뒤에 또 산행 얘기를 꺼내고, 또 집에서 일상을 보내는 일이 반복됐다. 나는 입으로만 산행을 얘기하는 사람이 됐고, 아내는 나의 '입산'을 금지시킨 것이다.
#2019-20년 겨울은 따뜻하다. 눈 다운 눈이 한 번도 오지 않았다.
2020년 새해에 나는 다시 겨울 산행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12월부터 이어온 따뜻한 겨울이 계속되더니, 1월 둘째 주에는 눈 대신 60mm 가까운 기록적인 겨울비가 내렸다. 동네 청수계곡은 여름처럼 큰 물이 흐르며 멋진 모습을 만들어 냈지만, 기후변화가 원인이니 아름답다고만 할 수도 없었다.
달력으로 1~2월에 가는 겨울 산행이 아니라, 춥고, 눈 쌓인 진짜 겨울 산을 가고 싶었기에 일기예보만 보며 몇 번의 주말을 흘려보냈다. 나의 겨울산행 계획을 알고 있는 아내는 '입산금지'라며 놀리곤 했다. 아무리 따뜻한 겨울날이 계속되어도 날씨만은 나의 희망을 모른 척하지 않을 것 같았다.
1월이 지나고 2월이 되었다. 주말에 눈이 온다는 일기 예보 뉴스가 나왔다. 혹시나 해서 기상청 홈페이지에서 여러 날씨 정보를 보니 이번에는 확실한 것 같다. 입산금지를 피하기 위해, 날씨에 상관없이 주말에 산행을 하겠다고 가족들에게 미리 선포했다. 주말이 점점 다가오고, 지역에 따라 눈 예보가 조금씩 달라져 불안했지만, 1순위는 북한산, 2순위는 눈 산행이 가능한 서울 근교 산행이다.
토요일 아침, 일기예보대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다시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니 서울 기준 1~3cm 눈 예보. 많은 적설량은 아니어도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눈이 쌓이는 날이다. 산행 준비를 하여 집을 나서는데, 가족들은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산에 간다고 오히려 응원해 준다. 대설주의보가 내려져도 개방되는 북한산 청수계곡-영취사 코스로 떠난다. 마침 집 앞이다.
정릉 탐방 안내소를 지나 산행을 시작한다. 적막함이 가득 찬 청수계곡에는 눈이 내려 더 조용하다. 한두 사람 발자국만 남아 있는 청수계곡을 지나 2018년 무더위에 올랐던 대성능선 구간으로 들어선다. 대성능선 길은 기대했던 대로 눈 덮인 겨울 산의 모습이다.
발자국 하나 없는 길, 나뭇잎 하나 없는 나무, 사람 소리 하나 없는 숲에 고요하게 눈이 내린다. 산이 점점 더 하얗게 변하는 게 느껴진다. 산이라는 본질은 바뀐 게 없는데, 눈 덮인 산의 모습을 보니 더 기분이 좋아지고 더 아름다워 보인다.
#첫눈에 가린 본질
요즘 정치와 사회운동 쪽에는 작가들이 많다. 그들만의 세계, 하얀 종이에 쓰인 그들만의 이론은 명쾌하고 올바르지만, 이 세상의 얘기가 아니다. 눈 덮인 산은 하얗게 변했지만, 산은 변하지 않는다. 같은 길, 같은 땅, 같은 나무, 뭐가 달라진 걸까? 세상의 진보와 변화라는 건 이런 건가? 눈 덮인 산처럼, 하얀 이론에 가려진 부조리.
겨울이라 두껍게 옷을 입고 나왔더니 오르막 길을 좀 걸었다고 땀이 좀 난다. 몸은 힘을 쓰면 자율신경계가 작동하여 땀을 배출하여 과열을 방지하지만, 정신은 자율신경계가 없어 과한 마음, 화난 마음, 가시 돋친 마음을 의식적으로 안정시키지 않으면 과열방지가 되지 않는다. 화가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은 마음 가는 대로 두기보다 단련이 필요한 것 같다.
#우주의 역사
산길에 사람이 지나가지 않아 동물 발자국이 많다. 동물도 이 산에 살고, 사람 다니는 이 길을 다니고 있었지만, 눈길을 걷기 전까지는 잘 몰랐다. 눈 위에 난 길을 보고 나서야 깨닫는다. 이 시대의 삶과 문명이라는 것도, 인류만의 문명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인류의 역사, 동물의 역사, 자연의 역사 모두가 모여 우주의 역사가 된다. 좁고 짧은 인간의 삶에서 이런 역사의 의미를 깨닫는 건 쉽지 않다.
눈 내린 산길에서 사색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영취사 위쪽 갈림길을 지나 평창동 갈림길까지 도착한다. 칼바위능선 전망이 훌륭한 데크길에서 두 번째 등산객을 지나치고, 북한산성 대성문까지 오르는데, 눈발이 조금씩 거세진다. 대성문을 지나 오늘의 목적지 대남문 방향 길로 접어들었는데, 바람이 불지 않는 북한산성 안쪽이라 새하얀 겨울 숲길이 되었다. 고도가 높아서인지, 눈구름이 강해져서인지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린다. 폭설이다.
대남문은 보수 공사 중인데, 북한산성 바깥에서 바람이 거세게 들이친다. 대남문 옆을 돌아 북한산성을 따라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701m 봉(요즘 잠룡봉이라 표시되어 있다)을 오른다. 잠룡봉 정상 주위로는 남쪽에서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과 폭설이 만나 상고대가 절경이다.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지만, 모자를 눌러쓰고 환상적인 분위기에서 눈꽃과 상고대를 보고 또 본다.
잠룡봉에서 다시 대성문으로 내려왔다가 북한산성을 따라 보국문 방향으로 가는데, 눈이 그치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일기예보를 확인했더니 한 시간 전쯤에 서울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 눈 산행을 대비하고 나왔기에 큰 어려움은 없다. 북한산성 성덕봉 전망대는 눈앞의 눈만 보인다.
보국문에서 북한산성 바깥으로 나와 청수계곡으로 내려간다. 길이 조금 미끄럽지만, 배낭 속 아이젠을 꺼내지 않고 내려가본다. 오전에 출발한 사람들이 이제 보국문으로 많이 올라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방한대책에 아이젠까지 차고 올라오는데, 방한대책 없이 올라오는 사람들도 있다. 집을 나설 땐 대설주의보가 발효되지 않았으니 산행 준비가 부실한 거 같은데, 북한산성 위쪽 눈보라와 추위에 고생할 것 같다. 모든 산행은 어느 정도 과한 안전대책이 필요하고, 특히 겨울산행 때는 장갑, 여분의 옷등 다소 과한 방풍, 방한대책이 꼭 필요하다.
#소소한 행복
청수계곡으로 내려올수록, 눈보라가 함박눈으로 바뀌어 눈꽃송이가 펑펑 내린다. 사실상 2019년 겨울 첫눈인데, 이런 눈을 만났으니, 산행하는 사람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 차 있다. 청수폭포를 지나 정릉 탐방안내소로 나올 무렵에는 눈발이 점점 약해진다. 탐방안내소 근처에서 아빠를 마중 나온 아이와 눈사람을 만들었다. 잠시 벗어나더라도, 결국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산행지: 북한산 (북한산성, 잠룡봉 701m) / 서울, 경기 고양
날 짜: 2020년 2월 16일
날 씨: 눈
일 행: 1명 (맑은물)
산행코스: 청수계곡-대성능선-대성문-대남문-잠룡봉(701m)-대성문-성덕봉전망대(630m) - 보국문 - 청수계곡 - 정릉 탐방안내소
산행시간: 3시간 35분 (9시 20분~12시 55분)
교 통: 도보 (서울시내에서는 110, 162, 143, 1020, 1213, 경전철 보국문 역)
[2020년 2월 15일, 북한산 눈꽃 산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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