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30. 23:11ㆍ북한산국립공원
오랫동안 산행모임 '더불어한길' (이하, 한길) 친구들과 산행이 끊어졌다. 서로의 집에서 모임을 하거나 경조사를 함께하고, 소셜 네트워크 단톡방으로 교류하지만 산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생각나곤 했다. 혼자 산에 가거나, 다른 지인들과 산에 갔지만, 한길 산행에 대한 아쉬움은 해소되지 못했다. 산행 사진, 산행후기를 볼 때 느껴지는 허전함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떠내려간 여러 추억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언젠가는 함께 산에 갈 수 있을 거라는 꿈은 잃지 않고 있었는데, 단톡방에서 일상 얘기를 나누다 우연히 산행의 뜻이 모아졌다. 5월 마지막 주 토요일로 날짜를 정할 때는 무덤덤했는데, 막상 그날이 되자 초등학교 첫 등교 때 설레어하던 딸처럼 평일 보다 일찍 잠에서 깨었다. 오래전 대중교통으로 경기도의 먼 산에 갈 때 맞춰 놓았던 생체 알람시계가 뒤늦게울린 것 같다.
만나기로 한 시간 10시가 되었다. 그런데, 상황이 복잡하다. 호~옹은 이미 15분 전에 정릉탐방센터에 도착했지만, 정릉 나들목을 나온 포비는 길을 잃고 다시 평창동에 가있다. 나는 늦게 준비하는 아이와 사소한 실랑이를 하고 있다.
뒤늦게 아이들과 함께 도착한 포비가 꺼내 놓은 폭탄 발언, '시동 켜 놓고, 차 키를 집에 두고 왔어요. 시동을 끌 수 없어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갈등 중이다. 다행히, 포비네 가족도 산행을 가기로 했다. 그렇지, 차보다 사람이 먼저지.
10시 30분이 되어 정릉 탐방안내소에 어른 아이 포함 모두 9명이 모였다. 한길 산행 모임에 언제 사연이 없던 적이 있었나? 사연이 있으니 한길 산행이다.
정릉 탐방안내소 주차장에 나온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들이 체온을 측정하고, 거리두기 캠페인을 하고 있다. 주말에 혼자 가까운 거리 산책할 때와 달리 오늘은 체온을 측정하고, 2m 거리 유지 리본을 받아 가방에 단다. 바이러스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만, 공포나 제도적 대응은 인위적 환경에 크게 좌우된다. 지금 북한산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보다 매미나방 애벌레가 창궐해 나무와 생태계에 심각한 재난이 되었지만, 국립공원 공단조차 관심이 없고, 엉뚱한 코로나 대책에 동원되어 있다.
청수 계곡 탐방로로 들어서니, 난간부터 안내판, 나무, 길 모두 매미나방 애벌레로 뒤덮여있다. 심지어 바람이 불면 줄을 타고 몇 마리 내지 수십 마리 애벌레가 날아다닌다. 공중파 뉴스에도 보도되고, 국립공원 공단 직원들이 일일이 도구로 제거하는 물리적 방재를 한다지만, 애벌레 개체 숫자는 상상 이상이다. 이 상황을 직접 보지 못하면 '애벌레도 생태계의 한 부분이다'라고 할지 몰라도, 지금 북한산은 매미나방 애벌레 재난 '심각' 단계다.
포비와 함께 온 아이들은 더운 날씨에도 옷을 돌돌 말아 입고, 땀을 흘리며 애벌레를 무서워한다. 초록으로 우거진 숲, 산들바람, 산행의 즐거움보다는 애벌레에 대한 두려움뿐이다. 둘레 길로 산행 코스를 바꿀까 생각해 봤지만, 주로 참나무나 활엽수가 많은 둘레길이라고 애벌레 재난이 덜하진 않을 것이다. 두 번 정도 쉬며 고민하다가, 아내와 아이들 3명은 매미나방 때문에 산행을 포기하고 먼저 내려가기로 한다. 이제 남은 어른 3명과 아이 2명은 애벌레 두려움을 이겨내고 대성 능선을 지나 북한산성까지 가야 한다. 하필 올 들어 가장 덥다.
처음엔 청수 계곡 아래쪽에만 애벌레가 창궐한 줄 알았다. 지난해 조금 생겼던 매미나방 경험과 지난주 산책 경험으로 유추해 보면 그렇다. 하지만, 대성 능선을 따라 올라가도 활엽수, 특히 참나무 아래쪽에는 매미나방 애벌레가 많다. 애벌레가 갉아먹다 떨어트린 참나무 잎이 탐방로에 가을 낙엽보다 두껍게 쌓여간다.
애벌레 재난에도 불구하고, 8살 아이 2명은 산행에 신이 났다. 서로 용감함 경쟁을 하느라 애벌레도 무서워하지 않고, 가파른 산길도 힘들지 않게 오른다. 나는 중간중간 나무 사이로 보이는 형제봉, 칼바위 능선, 북한산성 능선을 설명해 준다. 어른들은 듣고, 아이들은 딴 세상에 가 있다.
영취사 갈림길과 평창동 갈림길을 차례로 지나 일선사에 도착한다. 일선사 마당에 서면 형제봉, 백악산, 남산, 서울 시내가 보이고, 그 뒤로 관악산도 흐릿하게 보인다. 일선사 근처에서 준비한 점심을 먹으려고 보니 오늘이 마침 윤사월 부처님 오신 날이라 공양밥을 준다고 한다. 오랜만에 공양밥이라 밥과 나물의 비율 조정에 실패했지만, 맛있다.
일선사를 뒤로 하고 대성문을 향해 출발하는데, 8살 재현이는 '아저씨, 그런데 가장 짧은 길로 가는 거 맞아요? 가장 짧은 길로 가야 해요'라고 끊임없이 압박성 질문을 한다. '북한산성을 보고 바로 내려가는 가장 짧은 길이야'라고 둘러말했는데, 북한산 산세를 좀 아는 새담이는 '사실 아닌데....'라며 아빠를 바라보고 웃는다.
정릉천 발원지를 지나 대성문이 가까워지니 잠시 줄어들었던 매미나방 애벌레가 다시 많아진다. 특히 탐방로 계단 난간에 특히 더 많이 붙어 있어, 가능한 가운데로 걷는다. 난간을 잡지 않아도 오를 수 있어 다행이다.
드디어 북한산성 대성문이 눈앞이다. 새담이가 가장 먼저 대성문을 통과한다. 대성문 위쪽으로는 애벌레 개체수가 적어, 모두 잠깐 앉아 쉬었다 간다. 대남문에 갔다가 보현봉(옆)을 지나 되돌아오는 코스로 가려다가, 보국문 방향으로 가기로 한다. 이쪽 길이 조금 더 가깝고, 아이들에게 무난할 것 같다.
북한산성을 따라 걸으니 백운대, 인수봉, 노적봉 조망이 펼쳐지고, 도봉산, 수락산 조망도 좋다. 날씨도 좋고, 하늘의 흰구름도 좋다. 640m 봉 전망대에 도착하여 앉아 쉬다가, 보국문을 향해 내려간다.
보국문에도 새담이와 재현이 둘이 먼저 도착한다. 새담이는 지난 3월에 왔던 곳이라 반가워한다.
"아빠, 사람들은 여기가 보국문인 줄 모르고, 그냥 다리인 줄 알고 지나갈 거 같아."
잠시 후 도착한, 호~옹과 포비가 아니나 다를까? '보국문은 언제 나오냐'라고 한다. 우리 예측이 맞아 새담이와 나는 웃으며, 지금 보국문 위에 있다고 말해준다. 보국문은 윗쪽 누각이 없는 암문이다.
보국문을 빠져나와 청수 계곡으로 내려간다. 높은 산에서 내려서는 순간은 약간의 아쉬움이 남지만, 올라가면 내려와야 하는 것은 산행이나 인생이나 같다.
북한산성의 즐거운 산행이 다시 공포 산행으로 바뀌는 데는 5분이 체 걸리지 않았다. 청수 계곡 상류는 꽤 높은 상부까지 매미나방 애벌레가 창궐해 있다. 능선길 매미나방 애벌레가 바람에 계곡으로 날아와 더 많은 것 같다. 나무에서 떨어지거나,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애벌레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나뭇가지를 주워 앞을 휘저으며 걸었다. 그렇게 했는데도, 애벌레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상황이 생긴다.
지난 3월 산행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즐겼던, 청수 계곡 최상단의 약수터에 도착한다. 콸콸 쏟아지는 약수를 마시지만, 앉을 수 있는 자리에는 온통 애벌레 천지라 오래 쉬지는 못한다. 출입금지 구역이 아닌 청수 2교 위쪽 계곡에도 애벌레가 많아 계곡가에 내려가 잠시 쉴 수도 없다.
청수 2교를 지나 내려오는데, 호~옹 팔에 애벌레가 붙어 기겁을 하고, 내 팔 위로도 애벌레가 뚝 떨어졌다. (산행 끝나고 한 3일 가려웠다)
애벌레를 피해 쉬지 못하고 내려오다 보니, 어느새 오전에 지났던 대성 능선 갈림길 화장실까지 금세 내려온다. 그리곤, 청수 폭포를 지나 정릉 탐방 안내소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내려간다. 느긋한 산행이 아니라, 어떻게든 애벌레 천국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암묵적인 목표가 모두의 걸음을 재촉한다. 8살 아이들과 함께 했고, 일선사에서 1시간 가까이 쉬었는데 5시간 30분이 걸렸다.
오랜만에 느긋하고 재미있는 한길 산행을 꿈꿨는데, 그만 매미나방 애벌레와 사투를 벌인 산행이 되고 말아서, 호~옹과 포비에게 미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마저 재미있게 즐기고, 씩씩하게 산행을 한 여덟 살 아이들은 참 대견하다.
산행을 끝내고 사람들과 집에 모여 식사 같은 간식을 먹으며 비로소 느긋한 시간을 즐긴다.
오랜만에 오랜 친구들과 함께한 산행은 산행 후기를 쓰는 며칠 뒤까지 그 여운이 남는다. 한길 산행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 진행 인생이니까.
산행지: 북한산 청수계곡-북한산성 코스(최고 640m) / 서울
날 짜: 2020년 5월 30일
날 씨: 맑음
일 행: 5명 (포비, 호~옹, 현, 담, 맑은물)
산행코스: 정릉 탐방안내소 - 청수 폭포 - 대성 능선 - 일선사 - 대성문 - 640 전망대 - 보국문 - 청수 계곡 - 정릉 탐방안내소
산행시간: 5시간 30분 (10시 40분~16시 10분)
교 통: 도보, 대중교통 등
[북한산 포토 산행기]


























'북한산국립공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족 산행하기 좋은 북한산 형제봉 (2020.10.17) (0) | 2020.10.18 |
---|---|
북한산 최고 능선 의상능선 '의상봉-용혈봉-나한봉-문수봉' (2020.10.11) (0) | 2020.10.12 |
아이가 처음 오른 북한산 청수계곡-칼바위능선(2020.3.15) (0) | 2020.03.22 |
2019년 겨울 서울 첫눈 쌓인 날. 북한산 산행의 사색 (2020.2.16) (0) | 2020.02.19 |
북한산 청수계곡-화계사 짧은 산행 (2019.11.29) (0) | 2020.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