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 28. 21:48ㆍ북한산특집
나에게 산에 가는 의미는 등산이라는 목적보다 자연을 찾고 자연을 즐기는 의미가 크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는 함께 산을 즐길 친구도 거의 없고, 전 직장 후배가 유일한 산행 동료가 되었다.
'산에 가자. 시간되면 같이 가고, 시간이 안되면 기다렸다 시간 맞춰가고. 떠나자 산으로!'라고 말하고 싶지만, '산'이 아니어도 요즘은 각자 방식으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산행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이번 봄에도 진달래 산행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전 직장 후배와 시간을 맞추기 위해 2주를 기다렸더니 진달래 산행 계절이 지나고 신록의 계절이 되었다. 4월 말~5월에는 더 좋은 산을 고르기 위해 고민할 필요 없이 어느 산에 가도 봄을 만날 수 있다. 제철 과일이 맛있듯이, 요즘 제철 산행은 신록산행이다.
토요일 오전 10시. 북한산 정릉 버스 종점에서 후배를 만난다. 서울 산행이지만, 아침 10시는 이른 시간이라 비 온 뒤 상쾌해진 공기를 느낄 수 있다. 탐방안내소 주차장에서 바라본 하늘은 청명하고 북한산은 연초록으로 빛난다. 등산한다는 느낌보다는 산에 들어간다는 느낌으로 청수 계곡을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어제 그제 봄비가 제법 내려 계곡물도 더 생동감 있게 흐른다.
산 안에서 만나는 신록은 산 밖에서 보는 것과 또 다른 느낌이다. 초록인가 연두인가, 잎인가 그냥 새싹인가? 빛이 아닌데 빛이 나고, 나뭇잎일 뿐인데, 모여 초록 산이 된다. 신록만 있냐 하면 발아래엔 새싹이 있고, 민들레, 꽃다지, 이름 모를 봄 풀꽃들이 찬란한 삶의 한때를 보내고 있다. 산에는 하얗고 노랗고 옅은 분홍이 꽃들이 조화를 이룬다. 청수 계곡 물은 아래로 흐르지만, 청수 계곡 봄은 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오늘 같은 날에는 산을 오르는 사람보다 봄기운이 더 빨리 산을 오를 것 같다. 넓적 바위까지는 힘이 빠지기보다 봄의 기운으로 점점 힘이 나는 느낌이다.
청수 계곡은 신록으로 물드는 가운데 분홍 진달래가 남아 있지만, 계곡물이 점점 줄어들며 고도가 높아지니 곳곳에 산벚꽃이 활짝 피어 있다.
이 좋은 계절, 제철산행에 등산객이 많은 것도 아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 서너 명과 동선이 겹치고, 소규모 산행 모임 몇 명을 만날 뿐이다. 그 사람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산을 오른다. 앞서간다는 느낌도 없고, 뒷 쳐졌다는 느낌도 없이 오르막을 오르니 어느새 북한산 보국문에 도착한다.
보국문을 통과하여, 보국문 상단 북한산성으로 올라 북한산성을 따라 대동문 방향으로 오른다. 지난가을 지났던, 칼바위 능선 갈림길을 지나 북한산성을 따라 걸으니 금세 대동문에 너른 터에 도착한다.
몇 년 전만 해도 대동문 안쪽 너른 터는 단체 등산객들의 식사 장소였는데, 최근 국립공원 음주규제로 인해 오늘은 엄청나게 깨끗하다. 후배와 신록 그림자 아래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고 나니 이제 겨우 12시. 곧바로 대동문을 지나 하산하면 너무 이른 시간에 내려갈 것 같아 북한산성을 따라 동장대로 향한다.
북한산성 지휘통제소였던 동장대를 다시 찾은 것도 어느새 10년 만이다. 봄이 빨리 왔다 빨리 가듯, 시간도 급류처럼 빠르다. 기억 속의 동장대는 작지만, 지휘부답게 위엄 있는 모습이었는데, 오랜만에 보니 북한산성의 여느 유적지처럼 쓸쓸해 보인다.
동장대를 지나 계속 직진하면 만경대를 지나 백운대로 갈 수 있지만, 다시 대동문으로 돌아온다. 진달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진달래 능선을 선택하려다가, 4.19 국립묘지를 보고 싶다는 후배의 의견에 따라, 구천계곡으로 하산한다.
가파른 길을 20여분 내려가면 구천계곡 상류에 도착하는데, 2017년 여름에 홀로 대동문을 지나 구천폭포 방향으로 하산할 때 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지리학적으로는 같은 공간, 같은 길이지만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다른 모습,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산행, 비록 우리 인간의 인지능력의 한계라 할지라도, 산행을 즐거움을 위해 의심 없이 산행의 색다름을 느낀다. 봄이라 구천계곡 상류에서부터 계곡의 변화를 느끼며 하산하는 것은 산행의 또 다른 묘미다. 처음에는 시냇물처럼 작은 계곡이었지만, 물은 조금씩 늘어나고, 나무의 변화도 느껴지고, 신록도 다시 점점 짙어진다. 아침보다 더 신록이 짙어진 것 같기도 하다. 청수 계곡의 봄과 구천계곡의 봄은 같은 날인데도 오전과 오후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과학 산행대는 아니니까, 그저 오감이 느끼는 대로 기분 좋게 자연을 느끼면 된다.
구천폭포 상부 폭포는 직접 보기 힘들지만, 구천폭포가 있는 곳의 바윗길은 조망도 좋고 아기자기 재미있다. 구천폭포 하부 폭포를 보기 위해 계곡으로 내려간다. 봄이지만 잠깐 손을 담그고 차가운 구천폭포 물을 느껴보고, 꽃잎이 가득 떠다니는 봄 계곡의 모습도 본다. 역시 좋다. 모든 것이 살아 있고, 모든 것이 숨 쉬고, 모든 것이 이 지구를 살리기 위해 뛰쳐나갈 것만 같다.
공사 중인 아카데미 하우스를 옆을 지나며 산행은 끝이 난다. 계곡길을 따라 4.19 국립묘지를 가려다가 잠깐 길을 잃었지만, 길을 찾아 드디어 4.19 국립묘지에 도착한다.
4월 19일이 며칠 지났지만, 다시 조용히 둘러보고, 기념관에 들러 그날의 역사를 꼼꼼히 읽어 본다. 현대 역사에 게을러서 인지, 4.19 혁명이 단지 며칠의 역사가 아니라, 1960년 늦겨울부터, 최소 2달 이상의 긴 역사임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마치, 2016년 촛불 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한 순간 급작스런 전복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4.19 혁명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5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를 살기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왜 이렇게 됐을까?
시민들의 엄청난 참여와 희생을 통해 겨우 기존 권력을 타파한 이후에 보통 2차 혁명은 잠시 '정치'에게 맡기고, 1차 혁명의 주역들은 잠시 생업으로 돌아간다. 그럴 때, 이 망할 정치는 1차 혁명의 주역인 노동자 시민들을 배신하고, 기존 권력 중 덜 부패한 세력과 쉽게 손을 잡고 만다. 이는, 전 세계 어느 곳, 어느 시대든, 공통적인 현상으로, 이론으로 상대를 누르기 좋아하고, 세금 배분권을 손에 넣은 것을 대단한 권력으로 착각하는 정치인들의 공통적인 습성인 듯하다. 이를 막기 위해, 1차 권력의 주역들은 지속적으로 권력을 감시하고, 생업에 있다가 언제든 다시 거리 행동으로 나서야 하는데, 기본 복지가 약한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런 권력 감시가 쉽지 않다.
50년 전 이 나라의 기틀을 만들기 위해 거리에서 목숨을 내놓았던, 선조들. 그들이 지금 이 시대를 보면 얼마나 실망할까? 한편으론 뭉클한 기분으로, 한편으로는 답답한 마음오 4.19 기념관을 둘러보고, 산행을 마친다.
산행지: 북한산 (정릉 북한산성)
날 짜: 2019년 4월 26일
날 씨: 맑음
산행코스: 북한산 정릉 탐방안내소 - 청수 폭포 - 청수 계곡 - 보국문 - 북한산성 - 대동문 - 동장대 - 대동문 - 구천폭포 - 4.19 국립묘지
산행시간: 3시간 50분 (오전 10시 10분 ~ 14시 00분)
일 행: 맑은물, JM
교 통: 도보 (북한산 정릉 탐방구간은 162번, 110A/B번, 1020번, 143번 시내버스 이용 가능)
[포토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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