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3. 22:16ㆍ산행일기
준비 없는 산행은 하지 않는 편이다. 영월 고향집에서 하룻밤 지내고 산행을 위해 나올 때까지 어느 산을 갈지 결정하지 못했다. 철쭉이 피어 있을 소백산 연화봉? 혼자 운전할 수 있는 날 아니면 가기 힘든 치악산 남대봉? 횡성 사자산? 갈팡질팡하다 철쭉 계절에 어울리고 길을 아는 산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태백산으로 향했다. 결국 준비 없는 산행을 했다는 변명이다.
38번 국도 석항 IC를 빠져나와 영월 산솔면에서 옥동천 옆 88번 지방도를 따라간다. 1000미터급 산이 이어지고 아래로는 구슬 같은 옥동천이 흐르는 김삿갓면과 상동읍 풍광은 언제 봐도 좋다. 구불구불한 화방재를 넘어 1km쯤 더 가서 유일사 탐방안내소 주차장에 도착한다. 준비물이 부족하여 화방재 휴게소로 뒤돌아 갔다 오니 2시 50분이다. 탐방안내소에서 '국립공원 스탬프'를 찍고 세 번째 태백산 산행을 시작한다.
첫 번째 태백산 산행은 20년 전 더불어한길 겨울산행 (https://mountainstory.tistory.com/117589)이었고, 두 번째 태백산 산행은 월드컵 4강 진출 기념휴일에 혼자 올랐던 여름산행이었다(https://mountainstory.tistory.com/200459)
두 번의 산행과 이번 산행까지 모두 유일사입구 코스로 산행을 시작한다.
초반의 낙엽송 길에 들어서니 예전 산행의 기억이 떠오른다. 태백사라는 작은 암자를 지나면서 처음 가는 길 같다.
임도 같은 등산로 옆으로 이 봄에 이 세상에 찾아온 초록기운이 가득 차 있다. 어느새 초여름이 되었지만, 이미 해발 1000미터를 넘는 높은 지역이라 초록 풀, 초록 나뭇잎, 봄꽃까지 걷기 좋은 길이 이어진다. 낙엽송 아래로 고사리과 식물인 관중(아래 사진)이 어우러져 있고 보이지 않는 산새 소리가 더해져 신비로운 장소에 온 것 같다. 처음으로 주목나무를 만난 시점에 산림유 전자보호림 안내판, 유일사 입구 안내판이 차례로 보인다. 주차장에서 유일사 입구까지는 50분이 걸렸는데, 남녀노소 누구나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숲길이다.
유일사 입구 갈림길을 지나고부터 본격적인 산행길이 시작된다. 고도가 높은 데다가 오늘 날씨도 변덕스러워 구름안개가 몰려와 주변 시야를 가린다. 조망이 막혔다가 조금 트인 곳에 도착하니 산 아래까지 보이지만 이웃 산은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조망이라는 바깥세상으로 시선을 돌릴 필요 없이, 지금 오르는 길과 나무, 풀꽃은 아름답다. 내가 오르는 산이 아닌 다른 산을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이 겨울 산행의 매력이라면, 여름 산행의 매력은 내가 오르는 길에 아름다움이 배치되어 있다. 산철쭉이 예쁘게 피어있는 길을 지나 점점 높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주목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꽤 많은 주목이 보인다. 아름다운 수형의 주목도 있으나 오래된 세월을 겪으며 밑동이나 나뭇가지에 거친 세월의 흔적이 담긴 주목도 많다. 외부 시선을 느낄 필요 없는 주목은 스스로에게 충실하며 굳건하게 생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기후위기로 인해 주목의 생이 더 짧아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살아 900년, 죽어 1100년인가?
정상이 가까워오는지 가팔랐던 길이 끝나며 점점 평평한 길이 나오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옆쪽의 수목 일부가 훼손된 것이 보인다. 일부에서 요즘 '공원'에 중점을 두고, 국립공원 탐방로를 지나칠 정도로 안전하고 편리하게 바꾸려는 움직임과 연관된 것 같다.
장군봉이 가까워질수록 기온은 낮아지고, 바람은 거세어지고, 안개는 짙어진다. 바람을 막아 줄 외투가 필요할 정도였지만, 팔뚝은 차가웠지만 걷기에는 딱 적당하다. 구름 속에서 사람들 소리가 나고, 거의 평지에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 무렵 장군봉 제단이 나타난다. 장군봉은 태백산에서 가장 높은 해발 1567미터 정상이다. 안개가 짙어 이웃 봉우리도, 이웃 능선도, 하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안개바람이 몰아치는 장군봉을 떠나 천제단으로 향한다. 등산로 옆으로 진달래와 철쭉이 활짝 피어 바람에 한들한들 거리는 게 높은 산 답다. 5분 거리의 천제단은 장군봉 제단보다 훨씬 더 크다. 오래전 무속인들이 성지여서 주변이 오염되고 훼손되는 등의 문제가 있었으나, 이제 문화제로만 잘 관리되고 있는 듯하다. 천제단에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천제단의 신성스러운 기운을 제대로 느낀 것이라 만족스러운 기분이 든다.
천제단에서 장군봉으로 돌아와 주목군락지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안내표지판을 보니 망경사로 돌아가는 길과 큰 차이가 없어 보여 망경사로 내려간다.
짙게 내려앉은 안개를 배경으로 매달려 있는 연등은 장식품이 아닌 어두운 세상에서 민초, 중생을 구원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다. 단종비각을 지나니 용정이라는 샘 뒤로 망경사가 있다. 용의 우물이라는 용정은 수량도 풍부하고, 한 모금 마셔보니 물맛이 좋아 작은 물통에 조금 담아 본다. 망경대에서 당골광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나, 나는 유일사 방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좁은 산길로 들어선다. 인적 없는 산길에 안개가 짙게 내려앉아 분위기는 좀 으스스 하지만, 태백산이 그리 험한 산이 아니라 마음이 조급해지지는 않는다. 예상대로 10분 정도 갔더니 주목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오를 때 지나갔던 길을 만난다. 주목군락지길을 거꾸로 내려와 유일사 입구 갈림길에 도착한다.
유일사는 등산로 능선에서 50여 미터를 내려간 골짜기에 있어 힘이 들 것 같았지만, 언제 유일사에 들를까 싶어 일단 계단을 따라 내려가본다. 유명문화제는 없지만, 오늘 날씨에 잘 어울리는 고즈넉한 사찰이었다. 유일사 아래쪽 끝에 야자매트가 깔려있어, 혹시나 하고 따라가 봤더니 '등산로 없음. 조난사고 다발지역' 경고 안내판이 나온다. 이미 오후 6시에 안개 자욱한 날씨에 얼른 되돌아 나와 유일사를 지나 주등산로로 올라온다.
올라왔던 임도길이 편할 텐데, 사길령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다가 임도로 만나는 길을 선택한다. 길이 험하지는 않지만, 오를 때 보다 안개가 더 아래까지 내려앉아 어두컴컴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앞쪽으로 양쪽으로 펼친 날개가 약 70~80cm에 달하는 맹금류로 보이는 새가 푸드덕 날아간다.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숲 속에서 이런 멋진 새를 만난 건 신비로운 경험이지만, 동시에 으스스함도 느껴진다. 오를 때처럼 여유 있게 천천히 오르면 산행을 충분히 즐기고 자연을 누릴 수 있는데, 으스스함이 느껴지면 아무래도 경계심에 감정을 빼앗기고 만다. 알면서도, 관중 군락지를 지나고, 바람은 거세지니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이 길은 서너 명이 함께 오르면 원시림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만, 혼자 다니는 것은 추천하고 싶지 않다. 난이도가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소 험함' 정도는 표시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큰 낙엽송 숲이 나타날 무렵, 안개가 옅어지며, 넓은 임도 등산로를 만난다. 올라갔던 길이다.
태백사를 지나 10여분 내려와 유일사 탐방안내소 주차장에 도착한다. 산행시간은 3시간 50분으로 지도 안내와 엇비슷 하였다. 주차장을 출발하여 서울까지 먼 길을 오는데, 차가 막히지 않아 좋았다.
산행지 : 태백산 (1567m, 강원도 태백)
날 짜 : 2023년 5월 30일
날 씨 : 흐림 (근처 소나기 & 빗방울)
산행코스 : 유일사 탐방안내소 - 유일사 갈림길 - 주목군란 - 장군봉 - 천제단 - 망경대 - 주목군락지 - 유일사 - 사길령길 - 임유일사 탐방안내소
산행시간 : 3시간 50분(오후 2시 50분~오후 6시 40분)
일 행 : 단독산행
교 통 : 자가운전
[포토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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