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27. 10:52ㆍ산행일기
대관령면 하늘이 잔뜩 흐렸다. 낮부터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가 맞을 것 같다. 비가 오면 산행을 포기할까? 포기하지 말까? 오늘 가려는 산이 하필 고루'포기'산이다. 가족은 용평리조트 물놀이장으로 가고, 나는 라마다호텔 옆에 차를 세우고 우산과 우비를 챙긴다. 만반의 준비를 한건 아니지만, 폭우가 아닌 이상 포기 없이 산행은 가능할 것 같다.
펫피아 공사장 앞 길을 지나 계곡을 따라가니 라일락과 함박꽃이 핀 갈림길이 나온다. 직진하여 오목골을 지나 정상으로 가는 길은 풀이 무성하여, 오른쪽 다리를 건너 임도 방향으로 간다.
쥐오줌풀 꽃이 여기저기 핀 임도를 걸으니 새 노랫소리도 들리고, 초록 숲의 기운에 하얀 고광나무 꽃 향기가 더해져 기분이 좋아진다. 코로 맘껏 숨을 들이쉬니, 숲을 들이쉰 것 같다.
10여분쯤 오르니 임도가 갑자기 좁은 등산길이 되며, 산 허리를 감싸고 돌아간다. 사람의 흔적이 희미한 임도를 잘못 들어서면 길을 잃을 것 같아, 약 50여 미터를 되돌아 나오며 등산로를 놓쳤는지 찾아봤지만, 길이 보이지 않아 원래 가던 길을 더 가보기로 한다. 임도가 좁아지는 지점에서 2~3분을 더 갔더니 고루포기산 정상이 표시된 산행표지판이 나온다.
사람만 다니는 등산로보다는 넓고, 임도보다는 좁은 등산로가 뚜렷하게 보여서 다행이다.
아래 산행 출발지점이 해발 850m를 넘고, 여기도 이미 해발 1000미터가 넘지만, 걷기 좋은 숲 길이 이어진다.
잔뜩 흐린 날씨 덕분에 갓 초록이 된 나무가 내뿜는 좋은 기운이 숲을 가득 채우고, 내 마음마저 초록에너지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다.
Mindfull=심 Full = 심플 = 간단한 마음 = 마음 비우기
요즘 유행하는 마음 돌보기는 결국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고민을 줄이고, 행동으로 이어질 결정을 간단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즐거운 마음에 발걸음은 가벼워지는데, 건너편 능선에서 윙윙윙 엔진소음이 들린다. 굴삭기 작업 소음인줄 알았는데, 걷다 보니 숲 사이로 풍력발전기가 보였다. 시끄러운 소음인건 맞는데, 그래도 이 숲은 여전히 새소리가 더 크고, 잡식성 동물 배설물이 자주 눈에 띈다. 풍력 발전기 소음도 문제라면 문제지만, 결국은 충분한 넓이의 숲이 있으면, 동물과 공존할 수 있을 것 같다.
고산지대이고, 오래되기도 한 고루포기산 숲은 매우 안정적으로 우거져있다. 키가 크고 굵은(직경 50cm 이상) 나무들이 중간중간 중심을 잡고, 적당히 키 큰 나무들은 어우러져 우거진 숲을 이루었다. 그 아래로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중간 크기 나무들이 빽빽이 우거져 경쟁하는 단계를 넘어, 자연스러운 질서로 공생공존 단계로 넘어가 매우 안정회된 숲이다.
그러다 보니 햇빛이 도달하는 숲의 지표면에는 풀들이 과하지 않고 균형 있게 자라고 있는데, 그 풀들이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미나리냉이, 미나리아재비, 졸방제비꽃, 벌깨덩굴, 광대수염, 눈개승마, 풀솜대, 둥굴레, 관중, 개감수, 병꽃, 철쭉....
이렇게 많은 꽃을 보며 걷는 산행은 처음이다. 화려하지 않게, 과하지 않게 초록 숲, 높은 고도에 맞게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색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꽃은 벌레를 부르고, 열매와 벌레는 새와 동물을 부르고, 씨앗은 퍼져나가고, 숲은 다시 균형을 이룬다. 꽃길도, 숲길도, 마음길도 이 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인생산행이다.
능경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을 만나고, 힘들게 치고 올라가는 경사 없이 고루포기산 정상에 도착한다. 날씨가 흐르기도 하고, 숲이 우거져있기도 하여, 주변 조망은 막혀있다. 정상에서 안반데기 방향으로 50미터 내려가니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안반데기 밭이 보인다. 오래전 잠시 일했던, 평창 청옥산 육백마지기 느낌도 난다.
논란이 되는 백두대간 주능선이지만, 경작지로 이용 중이라 풍력발전 단지로 개발된 지역이다. 개인적으로 큰 방향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풍력사업이 기업의 이익만을 위한 방향에서 벗어나, 자연과 주민과 공존하길 바란다.
되돌아 올라 정상을 찍고, 왔던 방향으로 가다가 백두대간 갈림길에서 능경봉 방향을 선택한다. 오목길 하산길 갈림길이 나올 때까지 다시 한번 백두대간 초록 꽃길을 걷는다. 이 길 참 좋다.
전망대 갈림길에서 오목골로 하산을 시작하니, 식생이 바로 바뀐다. 풀꽃길은 사라지고 참나무 숲이 이어진다.
10여분 내려오니 두 번째 갈림길이 나오는데, 산사태 발생으로 우회하라는 안내가 있다. 너무 멀리 돌아가는 것 같아 오목골로 내려간다. 밧줄이 설치된 심한 경사구간을 내려오니 졸졸졸 물소리가 들리는 오목골 상류에 도착한다.
흐린 날씨에 숲이 우거져 오목골은 어둡다. 계곡 규모에 비하면 수량이 많고, 검은 유기물이 계곡 바닥 군데군데 있지만, 물은 아주 맑아 보인다.
작은 계곡 합류지점을 지나 더 내려오니 계곡안쪽에 오목폭포가 있는데, 내려가는 길은 없다. 조금 더 내려와 올라갈 때 지난 다리 갈림길에서 계곡으로 내려간다. 물까마귀가 안내하는 대로 계곡을 거슬러 오목폭포를 마주한다. 작은 폭포지만, 계곡의 초록배경이 좋다.
계곡을 되돌아 나오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대관령면 시내에서 되돌아보니 그동안 이름 모를 산으로 지나쳤던 산이었다. 포기하지 말라며 산 기운을 가득 안겨준 고마운 산. 고루포기산은 초록충전기 같은 산이었다.
산행지 : 고루포기산 (1238m, 강원도 평창, 강릉)
날 짜 : 2023년 5월 27일
날 씨 : 흐림
산행코스 : 오목골 입구 - 오목골 우측능선 - 정상 - 백두대간길 - 오목골 - 입구
산행시간 : 3시간 40분(오전 10시 25분~오후 2시 5분)
일 행 : 단독산행
교 통 : 자가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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