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오른 겨울 선자령 (2023.2.22)

2023. 2. 22. 11:57산행일기

봄이 다가오니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 일에서 벗어나는 일탈을 위해 봄 방학인 아이와 함께 선자령에 가기로 했다. 요즘 KTX 강릉선은 인기노선이라,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기차표를 예매하지 못했다. 11시 넘어 청량리역에서 출발하여 진부역(오대산역)을 거쳐, 대관령 마을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으니 벌써 1시 50분이 넘었다. 산행 시간이 빠듯하다. 서둘러야 한다.

대관령에서 선자령 산행 시작점은 세 곳이다. 대관령국사성황사라는 큰 표지판을 지나 현대(HYUNDAI)라는 글씨가 적힌 큰 풍력발전기 옆까지는 같은 길이다.
첫 번째 등산로는 풍력발전기 옆 왼쪽 서낭골(?)에서 시작되는 길로, 재궁골을 경유해 선자령 정상에 오를 때 유용하다.
두 번째는 풍력발전기 옆을 지나 100미터 더 가면 만나는 국립기상과학원 구름물리선도관측소 앞길로 오르는 길.
세 번째는 구름물리선도관측소 건물 축대 아래 비포장길로 오르는 길이다. 두 번째, 세 번째 길은 능선을 통해 선자령 정상에 오를 때 유용하다. 각각의 등산길은 국가숲길(대관령숲길), 강릉바우길과  겹쳐져 국사성황사 주변에서 서로 연결돼 있지만, 산행 들머리 정보는 부족하여, 처음 선자령을 갈 때는 헷갈릴 수 있다.

아이와 나는 첫 번째 길로 시작하여, 재궁골을 거쳐 정상에 올랐다가 능선을 따라 내려올 계획이다. 거센 바람에 쌩쌩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옆 왼쪽의 하얀 눈밭을 지나 서낭골로 들어서니, 바람은 조금 잦아든다. 서낭골은 높은 봉우리 없이 얕은 언덕사이의 골짜기지만 물길이 많은 특이한 고산 지형이다. 작은 언덕과 작은 다리를 건너는 눈길은 미끄러웠지만, 아이젠 착용 없이 미끄럼을 타며 대관령 양 떼 목장 철조망이 나오는 언덕까지 오른다.
언덕 위 나무들은 거센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가 한쪽 방향으로만 자라고 있다. 언덕을 넘어서면 산림청이 조림한 전나무 숲이 이어진다. 곧은 전나무와 잣나무가 빽빽하게 자라는 숲에는 마법사가 살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사람들이 다닌 등산로는 눈이 단단하게 눌려 적설의 깊이를 알 수 없으나, 등산로를 벗어나 눈을 밟아보니 20~30cm 정도 쑥 들어간다. 겨울 산을 다녀보긴 했어도, 눈이 이렇게 많이 쌓여 다져진 길은 처음이다. 미끄럼을 타며 눈길을 걷고 싶었지만, 경사도가 올라가며 길이 더 미끄러워져 아이와 나는 아이젠을 착용한다. 평창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웅의 숲을 지나 잠시 내리막길을 따라 걸으니, 개울물이 얼지 않고 흐르는 재궁골이 보인다.

재궁골은 높은 고도에 위치한 골짜기답지 않게 한겨울인데도 완전히 얼지 않아 물이 흐르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추측하건대, 적당한 수온의 지하수가 많이 흘러나오기 때문인 듯하다.
산책길 같은 재궁골 계곡(개울) 길은 험하지 않고 물소리, 새소리가 쉼 없이 들리고, 하늘 향해 뻗은 낙엽송과 자작나무, 전나무를 보며 걸을 수 있어 좋다. 평탄한 길에 사람이 많지 않고, 아이와 재잘대며 걸으니 더 좋다.

재궁골 중간에 있는 샘터 표지판 근처에서 쉬며 샘을 찾아보았지만, 눈과 얼음에 묻혀있는지 찾지 못한다. 눈이 녹으면 진짜 샘이 나올까. 시간이 늦어 짧게 쉬고 정상을 향해 출발이다. 재궁골 나무 위로 들리던 바람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 비행기 소리 비슷하게 바뀔 무렵에 언덕너머로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조금 귀에 거슬릴 수도 있고, 좀 거친 바람소리려니 받아들일 수도 있다. 몇 년 전 산행 기억은, '풍력발전기가 보이면 곧 재궁골이 끝나고, 목장길이 나온다'였는데, 기억 품질이 떨어졌는지, 풍력발전기를 만나고도 한참 동안 재궁골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전히 완만한 경사이긴 해도, 2시간 정도 산행을 하다 보니 아이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시간이 늦어져 재촉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힘내자는 뻔한 말 대신, 재미있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장난치며 걷는다. 짙은 파란색 하늘이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 때쯤, 하늘목장 삼거리에 도착한다.
 
이곳은 하늘목장에 포함되는 구역이라, 제설장비가 눈을 치운 눈길을 따라 간다. 풍력발전기가 돌고 있는 능선 마루금이 가까워 올수록 바람은 점점 세지고, 풍력발전기 돌아가는 소리도 점점 커진다. 아이는 풍력발전기가 바로 옆에서 돌고 있으니 무섭다고 한다.
풍력발전기 옆에서 너른 목장길을 뒤로하고(이곳이 옛 선자령 고갯마루로 추정), 키 작은 관목이 우거진 숲길 방향으로 오른다. 여기는 아직 봄기운이 발 디딜 공간이 아니다. 한겨울 백두대간 바람은 매우 차갑고 거칠지만, 등 뒤에서 밀어주는 친절함은 있다. 키 작은 관목은 수종을 알기 어려우나, 봄과 초여름에는 철쭉이 많이 필 것 같다. 대관령 하늘목장, 삼양목장, 남쪽의 발왕산이 눈에 들어올 무렵, 너른 평지에 커다란 선자령 정상석이 나타난다.

오후 4시 30분 정상도착. 2시간 10분을 예상했는데, 30분이나 더 걸렸다. 늦게 도착해서 다른 등산객은 없다. 해발 1157미터 고도에, 10m/s가 넘는 강풍이 불어오는 정상의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아래로 뚝 떨어진다. 바람에 몸을 가누기 힘든 아이는 볼마저 새빨개졌지만, 신이 나서 뛰어다니며, 춥지 않다고 한다. 한겨울 백두대간 선자령에 씩씩하게 걸어 올라와 즐거워하는 아이, (우리 딸이라서 하는 얘기는 아니고)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씩씩한 아이와 함께 하늘아래에서 가장 멋진 곳에 왔다. 
바람이 점점 더 거세지지만, 잠시 조망 감상시간이다. 동쪽 방향으로 강릉시와 동해바다, 북동쪽 황병산이 보이고, 남쪽으로 보이는 제왕산은 눈이 하얗게 쌓여있고, 남서쪽으로 발왕산도 찾기 쉽다.  뒤로도 여러 높은 산들이 보이지만, 이름까지 알아내는 것은 무리다. 
 
이제부터는 능선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하산하면 되는데, 낮에 녹아 흐르던 물이 빙판길이 되어 아주 미끄럽다. 거센 바람과 미끄러운 길에 균형 잡기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아빠를 나무처럼 잡고 걷자고 한다. 정상 아래 너른 구역에는 누군가 눈을 쌓아 만든 방풍벽이 있다. 비박을 위해 만들어 놓았을까? 1미터 높이의 방풍벽 뒤에서 몸을 숙이니 바람을 막아주어 아늑한 느낌이다.
풍력발전기가 돌고 있는 구간을 지나 관목숲, 방풍림을 지나 물푸레나무 숲으로 바람에 떠밀려 빠른 속도로 내려간다. 물푸레나무를 보다가 문득 생각이 스쳐간다.  '물푸레나무는 어떻게 이 거센 바람을 이겨내고 숲을 이뤘을까? 작대기처럼만 자란 것은 아닌데... 제법 수령이 되어도 나뭇가지를 많이 뻗어내지 않고 바람에 적응하되, 이웃나무들과 함께 자라며 바람의 영향을 덜 받으며 오랜 시간 자라며 이런 숲을 만든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남향의 능선길이지만, 2월에 눈이 많이 내려 얼음과 눈길이 이어진다. 강릉방향이 잘 보이는 전망대가 나타났는데, 어느 지점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새봉(해발 1059미터)을 올랐는지, 그냥 지나쳤는지 모르고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더니 아이가 '발바닥이 힘들어한다'라고 하여, 바람이 덜 불고 햇볕이 비추는 곳에서 잠시 쉬며, 간식을 나눠 먹는다. 오늘만큼은 아이가 든든한 산행 동반자다. 
대관령전망대와 강원항공무선표지소 옆을 차례로 지나니 시멘트 포장길이 시작된다. 예정시간보다 늦었지만 해가 많이 길어져 한시름 놓는다. 살짝 녹았던 눈이 얼어붙은 시멘트 포장길은 꽤 미끄러워 조심해야 한다. 국사당성황당으로 내려가는 찻길도 얼음판이라 갈림길에서 눈이 덮인 산길로 들어선다. 미끄러지며 내려오니 대관령휴게소의 풍력발전기가 잔잔해진 하늘을 배경으로 멈춰있다.

 

구름물리선도관측소 축대 아래쪽으로 내려와 대관령 마을휴게소로 돌아오니 5시 50분이다. 해발 850미터 지점에서 시작하여 1157미터의 선자령 정상 왕복하는데 딱 4시간 걸렸다. 고도차는 약 300미터 밖에 안되지만, 왕복 11km가 넘는 긴 구간에 강한 찬바람이 불어 겨울산행으로 얕잡아 볼 수 없는 구간이었다.

 

'살다 살다 가장 센 바람을 만났다'

 

 

'살다 살다 가장 센 바람을 만났다'는 아이와 멋진 설경을 보며 안전하게 산행을 끝내서 다행이다. 뿌듯해하는 아이와 진부 쪽으로 내려와 맛있는 저녁을 먹고, 밤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산행지 : 선자령 (1157m, 강원도 평창, 강릉시)
날 짜 : 2023년 2월 22일
날 씨 : 맑음
산행코스 : 대관령휴게소 - 서낭골 - 재궁골(목장길) - 하늘목장 갈림길 - 선자령 정상 - 새봉 - 성황사갈림길 - 대관령휴게소
산행시간 : 4시간 (오후 1시 50분~오후 5시 50분)
일 행 : 딸과 함께 한 산행
교 통 : KTX 진부역 + 카쉐어링


[포토 산행기]

대관령마을휴게소 앞을 지키는 풍력발전기
현대라고 적힌 풍력발전기, 서낭골 갈림길
바람에 한쪽으로 가지가 쏠린 나무
마법사의 숲
곧게 자란 낙엽송
눈이 많이 쌓여있다
해발 900여미터지만 추워도 얼지 않는 재궁골
물이 흐르는 재궁골
재궁골 샘터 위치
재궁골 자작나무
재궁골도 그늘진 상류쪽은 얼었다
상어 모양으로 얼음 재궁골
재미있는 얼음이 많은 재궁골
하늘이 가까워진 느낌
재궁골길로 선자령 정상 오르는 길
바람의 파동이 만들어낸 구름
풍력발전기가 보이면 재궁골이 끝이다
대관령풍력단지
눈, 자작나무, 하늘
재궁골 상단, 튼튼한 느낌의 나무
재궁골을 벗어나 삼양목장 길을 만난다
선자령 풍력발전기
선자령 풍력발전기
대관령 풍력단지
풍력발전기 뒤로 강릉시내와 동해바다가 보인다
대관령 목장과 픙력단지
선자령 정상 오르는 아이
선자령 정상에서 강릉시, 동해바다 조망
선자령 정상석
백두대간 선자령
선자령 정상에서 남쪽 조망
정상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
선자령 남쪽으로도 풍력발전기
선자령 정상 남쪽 200미터 지점, 겨울비박의 흔적
해가 지고 있다
아이와 풍력발전기
강릉시내, 동해바다, 산 가운데 희미한 영동고속도로
구름이 참 다양하게 변한다
서둘러 가야 하는 이유
4시간만에 출발했던 대관령 휴게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