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27. 22:49ㆍ산행일기
봄이 됐으니 봄산행을 떠나 볼까? 가까운 산에 갈까? 멀리 떠나 볼까? 봄꽃으로 유명한 산행지를 알아보다가 지난주 언론의 문 대통령 산책 오보로 뜨거운 백악산을 선택한다.
산행지는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하면 된다. 하지만, 언론은 사주 마음대로 보도하면 안 된다. 언론 자유는 언론사 자유가 아니라 권력의 탄압으로부터 자유이고, 책임과 한 세트로 움직여야 한다.
직장에 휴가를 쓰고, 평일 낮에 떠나는 산행은 봄꽃 향기만큼 달콤하다. 집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부암동 삼거리에 내린다. 유명 에스프레소 카페 뒤 골목길을 돌아 창의문 안쪽으로 들어서니, 지긋한 연세의 문화해설사가 젊은 탐방객들에게 창의문(자하문)에 대해 설명 중이다. '창의문에서 서쪽 백사실 계곡과 홍제천 세검정 저녁노을 색이 아름다워 자하동(紫霞洞), 자하문으로 불려졌다'는 얘기였다. 어쨌든 공식 명칭은 창의문, 별칭은 자하문이다.
해설은 계속되었지만, 한양도성 창의문 안내소에서 표찰을 받아 산행을 시작한다. 안내소 뒤에만 올랐는데도 주변이 트여 기분이 좋다. 한양도성을 따라 오를수록 조망을 실컷 즐길 수 있다. 진행 방향 뒤쪽인 남서쪽으로 인왕산 마을, 오른쪽으로는 광화문 일대의 빌딩 숲, 북쪽으로 평창동과 보현봉-문수봉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비봉능선과 북한산성 능선, 탕춘대 능선을 보며 오른다. 성곽 주변으로 봄꽃이 활짝 피어, 도시와 자연이 잘 어울려있다.
한때는 불편한 규제였던 군사 보호구역, 고도제한, 문화재 보호구역이 역설적으로 이 일대 자연과 공간을 살려 놓았다. 가치 있는 문화재와 자연이 저절로 보호되는 시대가 아닌 만큼, 적극적인 보존정책, 규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계단을 따라 돌고래 쉼터, 백악 쉼터를 차례로 지나 백악마루까지 이른다. 북적이는 등산객 한쪽에 초병이 서있는 상황은 이 시대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큰 바위가 있는 백악마루 남쪽은 군사시설 보호구역이라 등산로가 없다. 길을 되돌아 청운대 방향으로 가니, 1968년 1.21 청와대 기습사건 때 총탄을 맞은 소나무를 만난다. 역사에 대한 단상보다는, 총탄을 맞고도 잘 자라는 소나무에 대한 경외감이 생긴다. 한양도성, 경복궁과 저 멀리 형제봉, 보현봉을 바라보는 좋은 위치에 뿌리내리고 유유자적 살아오다가 뜬금없이 현대사의 조연이 되었다.
산행계획을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았기에, 청운대 지나 만나는 갈림길에서 일주일 전 개방된 삼청공원길로 들어선다. 새로 생긴 목재데크 위에 서니, 숙정문에서 시작한 연초록 능선이 창덕궁, 종묘로 길게 내려앉는다. 백악산은 청와대 뒷산인 줄만 알았는데, 올라와 보니 높이에 비해 훨씬 크고 넓은 산이라는 느낌이 온다. 경복궁 뒷산 역할뿐만 아니라, 옛 한양도성의 중심이 되는 큰 산이었다. 물 속도, 사람 속도, 산 속도, 겉만 봐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삼청공원으로 직진하는 가운데 길 대신, 산책길을 따라 반시계방향으로 돌아보기로 한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아기자기한 골짜기가 잘 보존 돼 있고, 만세동방 샘터를 만날 수 있다. 삼청동 쉼터에서 만세동방을 거슬러 올라가니 1주일 사이에 유명해진 법흥사터가 보인다. 논란이 됐던 연화문 초석 주변은 시민들로 북적거린다. 대통령과 같은 자세로 앉아 사진을 찍으며, 대통령이 앉은자리라며 남녀노소 웃고 떠들며 이 시대의 이 봄을 즐긴다. 시민들에게 엄숙함, 정치 편향 따위는 없다.
법흥사터를 지나니 귀룽나무 초록잎이 감탄스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이번에 새로 생긴 계단을 따라 곧장 한양도성으로 올라와 곡장까지 쭉 올라간다. 곡장에서 보는 주변 풍광은 최고다. 광화문 종로일대, 남산, 지나온 백악산, 북쪽으로 북한산 보현봉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이리보고, 둘러보고, 멍하니 보며 뒤에 온 등산객 몇 팀이 내려가도록 한참을 곡장에 머무른다.
곡장에서 100미터 떨어진 곡장안내소에 표찰을 반납하고 4번 출구로 나가 북악산길을 만나고, 500미터 떨어진 팔각정에 도착한다.
팔각정 카페는 공사 중이고, 편의점 옆 평창동 방향 하산 길로 내려가는데, 진달래가 많다. 오후 햇살을 받은 진달래는 다양한 명암의 분홍빛을 발산한다. 이 시간에, 이 계절에, 이 공간에 오래 있고 싶지만, 짧은 하산길이 아쉽다. 하산 길과 평창동이 만나는 지점에서는 물길 3개도 만난다. 보현봉 아래 동령폭포를 지나언 홍제천 상류, 팔각정 방향에서 내려온 골짜기의 물길, 북악터널 쪽에서 내려온 물길이 이 지역에서 만나는데, 오래전 주택 개발에 개울이 아닌 콘크리트 우수로가 되어 버렸다. 언덕과 개울을 공유지로 폭넓게 살려 두었으면, 시민들의 삶의 질, 서울의 가치가 훨씬 더 높아졌을 텐데...
내 삶과 무관하니, 안타까운 마음만 가졌다 내려놓고 북악터널을 지나 집으로 돌아온다.
산행지: 백악산 (서울)
날짜: 2022년 4월 23일
날씨: 맑음
시간: 4시간 (13시 30분 ~ 17시 30분)
산행코스: 창의문-백악마루-법흥사지-곡장- 4번 출입구(북악산길)-팔각정-평창동
일행 : 나 홀로
교통: 서울 대중교통 이용
[포토 산행기]
'산행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와 함께 오른 겨울 선자령 (2023.2.22) (0) | 2023.02.22 |
---|---|
따뜻한 겨울, 함백산 산행 (2023.1.23) (0) | 2023.01.23 |
늦가을 홀로 철마산-천마산 걷기 (2022.11.6) (0) | 2022.11.06 |
정릉 ~ 팔각정 ~ 백악산 ~ 창의문 (2022.10.22) (0) | 2022.10.22 |
백검색불여일산행, 남양주 철마산 (2022.10.8) (0) | 2022.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