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3. 15:32ㆍ전국산행일기
영월에서 가까운 제천 금수산에 오르려 했으나, 시간이 부족하여 더 가까운 영월 태화산으로 목적지를 바꾼다. 금수산은 해발 1012m, 태화산은 해발 1027m로 비슷한 높이다. 금수산 최단코스는 약 5시간, 태화산 최단코스는 2시간 30분이 걸린다는 정보를 발견하고, 곧바로 흥교 태화산농장으로 출발한다.(주의: 네비에 꼭 '흥교태화산농장' 검색)
태화산에 가보지 않은 영월 사람들은 많아도, 태화산을 보지 못한 영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태화산은 영월읍에서 고개만 들면 남쪽으로 보이는 높은 산이고, 유명한 고씨동굴이 바로 태화산에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가봐야지 마음먹고 있던 산인데, 흥교 태화산농장 주차장에 도착해 보니, '이럴 수가?' 10여 년 전에 어딘지도 모른 체 흥교마을에 왔다 갔던 곳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현실이 되었다.
마을사람들 일에 방해가 안되게 주차를 하고, 산행 들머리로 향한다. 흥교마을 밭에서는 대여섯 명의 농부들이 마지막 고추를 따고 있는데, 얘기 소리를 들으니 베트남에서 오신 분들이다. 농업현실에 대한 한탄보다는 그들의 노동을 인정하고 농업에 종사해 주는 것을 고마워할 시점이 된 것 같다. 산행들머리 직전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흥교마을과 앞으로 펼쳐진 산세가 아름다워 흥교마을에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산행 초입은 좁은 오솔길인데 계절이 계절인 만큼 참나무 잎이 떨어져 미끄럽다. 산행 정보를 찾아보면, 이 코스는 짧은 대신 단조롭고 조망이 없다고 하여, 마음을 비우고 가는데, 등산로 주변의 참나무, 물푸레나무, 잡목과 바위가 왠지 눈에 익숙하다. 이 등산로는 처음이지만, 영월 곰봉 산행의 식생과 비슷하기도 하고, 고향집 근처의 검각산과 식생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영월군은 동서로 길어 지질, 지형이 다양하지만, 아무래도 기후가 비슷하니, 영월의 다른 산과 식생은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조림지역 옆으로 부드럽던 길이, 주능선 사면으로 접어드니 잔바위와 낙엽이 많아진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쉬지 않고 다소 빠르게 걸으니, 55분 만에 주능선 1020봉에 도착한다. 앞쪽으로 보이는 태화산 정상을 향해 주능선 안부로 내려서며 좌우를 보니 서쪽으로 나뭇가지 사이로 희미하게 영월읍이 보일 듯 말 듯하고, 동쪽으로는 마대산과 남한강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다 사라졌다 한다. 제한된 조망마저도 이 계절에, 영월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나 알아보지, 보통 사람이 오면 나무, 나뭇가지, 낙엽만 보며 산행을 할 것 같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고, 산에 가면 산의 원리를 따르라
나뭇가지에 가려진 조망을 보며, 나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고, 산에 가면 산의 원리를 따르라'는 속담을 만들어 낸다. '저 나뭇가지만 없으면 조망 끝내주겠는데...'라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찰나의 욕심 때문에 자연을 함부로 하기보다, 나뭇가지에 막힌 조망이 원래 자연의 조망이라고 받아들인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을 대하는 우리 마음이자, 삶을 대하는 우리 자세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태화산 정상석 2개가 어느새 눈앞이다. 하나는 영월군에서, 하나는 단양군에서 사이좋게 만들어 놓았다. 태화산 정상은 이 능선에서 가장 높은 장소일 뿐 특별히 솟은 봉우리는 아니다. 고로, 정상에서 조차 머리 위 하늘 조망 밖에 없다. 능선을 따라 고씨동굴 방향으로 진행하면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가 있다고 하지만, 시간에 쫓기는 나는 바로 올라왔던 방향으로 돌아 내려온다.
1020봉을 지나니 하늘이 어둑어둑하며 바람이 부는 것이 비가 올 것만 같다. 급하게 기상청 예보앱으로 확인해 보니 근처로 약한 소나기가 지나가지만, 운 좋게 태화산은 비켜 갈 것 같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더 서둘러서 내려간다. 갑자기 변하는 날씨 때문인지, 올라온 길과 같은 길인데 되게 낯설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혹은 도깨비에 홀린 듯한 싸한 기분이 든다. 미끄러운 낙엽에 정신을 집중한다.
잣나무 조림지역을 지나 벌목지대에서 왼쪽(남서쪽 사면)으로 등산로를 벗어나보니 앞이 확 트여 태화산 남-서쪽의 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비가 올 듯 몰려왔던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며 환상적인 모습을 만들어 낸다. 단양 어상천의 삼태산과 옥계산을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산들과 구름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 옥계산 너머 서쪽으로 희미한 산군들이 펼쳐지지만 산 이름을 알 수는 없다.
등산로로 돌아와 뒤쳐진 시간을 빠르게 돌려놓으려는데, 바위에 깔린 미끄러운 갈잎을 밟고 잠시 중간에 떴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여기는 시간을 늘렸다 줄였다 하는 이상한 나라가 아니라 태화산이었던 것이다. 낙엽길은 눈길보다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깨닫는다. 넘어지는 충격에 시큰거리는 손바닥을 비비며 마지막 낙엽길을 통과하여 산행들머리로 돌아온다. 일몰이 가까워오는 흥교마을이 오후 시간보다 더 아름다워졌다.
흥교 태화산농장 주차장 옆은 세달사지(터)인데, 어떤 곳인가 찾아보다가 궁예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 궁예가 출가한 절이 소백산 근처 어디냐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2012년 바로 이곳에서 '흥교'라고 적힌 기와 막새 유적이 발견되어, 궁예가 출가한 절이 바로 영월 흥교사(세달사)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흥교 마을 풍광과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던 이유가 혹시 나도... (🤔🙃).
궁예는 청년시절 훌륭한 뜻을 세우고, 행동으로 옮기며 권력을 얻었다. 그렇지만, 권력을 좋은 세상을 위한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됐다. 권력을 누리려는 마음이 커지며, 결국 삐뚤어진 역사로 이어졌다.
1000년 전에는 권력자 개인의 성품과 수양이 중요했다면, 현시대는 권력을 바꿀 힘이 있는 시민들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아직도 권력을 휘두르는 구원자를 기다리며 시민이 아닌 백성으로 남고자하는 사람들이 있어 안타깝기도 하다.
시간에 쫓긴 짧은 태화산 산행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닫고 집으로 돌아간다.
산행지: 태화산 (1027m, 강원 영월군, 충북 단양군)
날 짜: 2023년 11월 3일
날 씨: 구름 많음
코 스: 흥교 태화산농장- 정상- 흥교태화산농장
시 간: 2시간 10분 (오후 2시 40분 ~ 4시 50분)
일 행: 맑은물
교 통: 제천역 카쉐어링
[포토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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