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14. 14:34ㆍ산행일기
2010년 새해 첫 출근일인 1월 4일 몇십 년 만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서울 도심의 큰길은 물론이고 변두리 도로와 골목길까지 눈 속에 파묻혀 도시는 큰 혼란을 겪었다. 자동차 운전자가 아니더라도 고된 출퇴근길에 이리저리 치이는 월급쟁이들의 불만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늘 그렇듯 기상청은 시민들의 분풀이 대상이 되고, 삽 한 자루 들고 눈 치우기를 정치쇼로 이용하려고 했던 서울시장 역시 시민들의 뭇매를 맞는다. 시청과 시장이 대응을 잘한 것은 없지만, 그들이라고 엄청난 폭설에 시청이라고 무슨 별 수가 있겠는가?
자기 집, 상가 앞에 쌓인 눈은 스스로 치워야 하는 것은 조례를 제정하여 법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는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현실에서 직장인들은 아무리 많은 눈이 내린다 해도 눈길을 뚫고 출근작전을 완수해야만 하기에, 눈을 치우는 조례는 실효성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출근을 해야만 하는 현실을 뛰어넘는 다른 생각을 하면 대안은 널려있다. 눈이 많이 내리면 출근을 하지 않고 동네사람들이 모두 모여 골목길 눈을 치우고, 아파트 주민들도 자발적으로 눈을 치우며 이웃 얼굴도 보고 수다도 떨고, 행정기관은 그런 날을 공동체를 위한 휴일로 지정하면 쉽게 해결될 일인데, 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현실에서 새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폭설 때문에 더욱 혼잡해진 지옥철로 출퇴근하느라 일주일 동안 지친 심신을 달래려고 주말에 눈 덮힌 겨울산을 찾아 나선다. 토요일까지는 포천의 왕방산을 가려고 했는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인데 혹시 길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겨 예전에 한번 산행을 했던 팔당의 운길산을 찾는다.
가까운 곳이라고 게으름을 피우다 보니 오히려 더 늦어지는 시간, 집을 나서 회기역에서 중앙선 전철을 타고 운길산역에 내리니 이미 오후 2시가 되었다. 서둘러 제설작업을 끝낸 서울을 벗어나 아직 많은 눈이 남은 팔당에 온 것만으로 나비는 즐거워한다.
운길산 산행 들머리를 몰라 팔당댐 45번 길을 따라 팔당생협(보건소)을 지나 산행입구를 찾는다. 예전보다 음식점이 많이 늘어나서 잠시 헷갈렸는데, 잘 살펴보니 몇 년 전 올랐던 콘크리트길이 있는 코스다. 그때는 3월 초라 단단한 콘크리트 길을 밟으며 올라갔는데, 오늘은 하얀 눈을 밟으며 오른다. 산 중턱 사찰까지 이어지는 찻길을 좋아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매연을 내뿜는 차가 산중턱까지 오르는 게 싫다. 게다가 콘크리트 길을 걷다 보면 괜히 무릎이 금방 피로해지는 느낌이 있어서 사찰로 이어지는 길은 싫어하는 편이다.
하지만, 오늘은 눈 덕분에 차량은 1대만 올라갔고, 눈 쌓인 숲의 모습을 감상하며 천천히 걷기 좋은 길이 되어 있다.
콘크리트 포장길이 끝나는 운길산 입구에는 전에 없던 조그만 산장(식당)이 생겼다. 나비양과 함께 늦은 점심을 먹고, 운길산 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종사에서 내려다보는 양수리의 풍경에 빠져든다. 팔당호는 한겨울 맹추위에 꽁꽁 얼어서 푸른 강이 아니라 하얀 벌판이 되어 있다. 원래도 운치 있는 수종사는 하얀 눈이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워졌다. 폭설 때문에 먹이를 찾기 힘들어진 겨울새들이 사람 주위를 맴돌기도 한다. 사찰에서 만나는 동물들은 왠지 전생에 나랑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수종사 옆의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를 지나 정상을 향해 오른다. 15분 정도면 정상에 도착해야 하는데,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 왠지 다른 길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시간은 이미 예상보다 늦은 오후 4시를 넘어가고 있다. 같이 간 나비는 오랜만에 산행인 데다 미끄러운 눈길에 힘들어한다.
예상보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운길산 정상에는 10여 명의 중년 산행객들이 서로의 닉네임을 부르며 시끌벅적하다. 몇 년 전만 해도 인터넷 닉네임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었는데 요즘은 나이 지긋하신 분들도 닉네임을 많이 사용하는 게 재미있다. 어쨌든, 나이로는 중년일지 몰라도 이렇게 추운 날씨에 폭설을 헤치고 산을 다니시는 분들은 혈기왕성한 청년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
출발할 때 계획은 운길산 정상을 넘어 능선을 타고 새재고개를 지나 덕소로 하산하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많이 늦어 출발했던 운길산 역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정상에 머물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 하산을 시작한다. 겨울산행은 해가 빨리 지고, 눈이 많아서 조금 서둘러야 하지만 시간은 이미 5시를 향해간다. 주위가 어둑어둑 해져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쌓인 눈 덕분에 해가 져도 눈길은 훤하다. 눈길이 미끄럽긴 해도 푹신푹신해서 하산길 무릎에 부담도 적다.
주변이 제법 어두워져 랜턴이 필요할 때쯤 저 멀리 운길산역에 환한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잣나무 숲을 지나니 산행객들을 위한 식당이 나타난다. 오를 때와는 다른 길로 내려와서 운길산역 앞에서 나비양이 사주는 맛있는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늦은 시간이라 오히려 전철에서도 자리에 앉아서 깜빡 눈을 붙였다 일어나 보니 어느새 청량리 역이다.
오랜만에 산행, 오랜만에 겨울산행, 다시 찾은 운길산 산행, 나비와 함께한 첫 산행. 모든 게 만족스럽고 즐거운 산행이다.
산행지 : 운길산 (경기도 남양주)
날짜 : 2010년 1월 10일
날씨 : 맑음
산행시간 : 4시간 10분(1시 30분~5시 40분)
산행코스 : 운길산역-조안면보건소-수종사-정상-운길산역
일행 : 맑은물, 나비
교통 : 중앙선 전철 이용
[포토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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