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17. 23:27ㆍ산행일기
2007년 1월 설악산 산행 이후 3년 만에 설악산 산행을 하게 되었다. 이번 산행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떠나기 때문에, 떠나기 전부터 산행의 설렘이 두 배가 되었다.
토요일 새벽에 동서울버스터미널을 못 찾고 헤매는 택시 때문에, 터미널에 도착해 보니 한계령행 버스가 이미 떠나버렸다. 겨울철 산행이라, 출발이 늦으면 산행을 못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6시 50분에 원통행 버스가 있다. 동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양평, 용문, 홍천 등을 들르며 지역주민, 고등학생들을 태웠다 내려주기를 반복하며 3시간 만에 원통터미널에 도착한다.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지만, 원통에서 한계령 가는 버스는 2시간간 뒤에서 있다고 하여, 한계령까지 택시를 타기로 한다.
이번 산행을 함께하는 개똥이, 먼 발치에서, 여자 친구, 이렇게 4명과 배낭까지 가득 실은 택시가 한계령을 향해 출발한다. 요금이야 2만 원이 조금 넘게 나온다지만, 한계령을 택시 타고 오르는 호사를 누리다니! 얕은 죄책감에 잠시 마음이 편하지는 못하다. 3년 전 엄청난 홍수를 겪었던 한계천은 복구가 진행되어 이제 어느 정도 회복이 된 걸로 보인다. 옥녀탕 휴게소, 장수대를 지나 설악산에 좀 더 가깝게 들어서자, 창 밖으로 비경이 시작된다. 설악산을 찾을 때마다 장수대를 지나면서 설악산에 왔다는 것이 실감된다.
구불구불 고갯길을 올라 한계령에 내렸더니, 매섭게 차가운 설악산 바람이 쌩하니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한계령 휴게소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겨울철 입산 마감 시간인 11시를 10분 남겨두고 한계령 탐방지원센터를 지나 산행을 시작한다. 한계령 탐방지원센터만 올라도 흘림골 상류의 뾰족뾰족한 봉우리가 멋지게 펼쳐진다. 이미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곳이라 바람은 차고, 눈이 얼어붙은 길은 미끄럽다. 아직 몸이 덜 풀린 '먼발치에서'는 초반에 숨이 차서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매스꺼움이 느껴진다며 많이 힘들어한다. 오랜만에 산행에 나선 사람들이 흔히 겪는 일이라, 큰 걱정은 하지 않고 대신 걷는 속도를 줄이고, 먼발치가 회복되기를 기다린다. 나도 이런 증상은 겪은 적이 있는데, 심장박동이 정상이 되면 몸이 풀리고, 숨찬 것도 덜해지게 된다.
출발한지 한 시간 정도 지나 1307봉 전망대에 오르니 설악의 남서쪽을 책임지고 있는 서북능선의 귀때기청봉과 그 옆으로 가리봉, 점봉산 등 남설악 일대 조망이 시원하다. 전망이 트여서 그런 것인지, 몸이 적응된 건지 호흡곤란(?)을 겪던 먼발치에서도 이제는 완전히 회복됐다.
1307봉 전망대에 올랐다가 내려가는 길은 쌓인 눈에 미끄러지며 내려간다. 한참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 한계령 갈림길에 이르면 서북능선 너머의 내설악의 백담사계곡, 공룡능선, 마등령, 황철봉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갈림길에서 한숨 돌리고, 대청봉을 향해 서북능선을 탄다. 갈림길에서 대청봉까지는 서서히 고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기본적인 산행 준비만 되어 있으면 서북능선은 힘들지 않은 걷기 좋은 등산로이다.
여름의 서북능선이 많은 풀과 꽃들, 나무들, 산새와 다람쥐등 동식물이 어우러진 초록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데 반해, 겨울의 서북능선은 다소 앙상해 보인다. 하지만, 겨울 서북능선의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들은 모습은 또 다른 공동체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또한, 여름보다는 겨울이 조망이 좋아 남쪽의 점봉산을 너머로 달려가는 백두대간과 강원 내륙 고산들. 북쪽의 황철봉과 향로봉을 지나 달려가는 백두대간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며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다.
평균 고도가 높은 데다가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때문에 서북능선 위의 하늘은 파랗다 못해 검파랗게(?) 느껴질 정도로 맑고 고요하여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하늘이 아니라 우주를 보고 있는 듯하다. 검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반짝이는 은빛 자작나무의 모습은 초현실주의 예술작품 같은 느낌이 든다. 함께 산행에 나선 사람들 모두 겨울 하늘의 짙은 파란색에 매료되어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서북능선을 따라 대청봉에 가까이 올라갈수록 적설량이 점점 많아져서 원래 길이었던 등산로를 걷는것인지, 눈길 위를 걷는 것인지 헷갈린다. 서북능선에는 여름에 많았던 다람쥐는 모두 어디로 가고, 산새가 우리를 따른다.
먼발치는 이제 완전히 회복됐고, 산행때 힘든 모습을 보여준 적 없는 개똥이는 오늘도 씩씩하게 산행을 하고 있지만, 출발할 때 컨디션이 좋았던 여자 친구도 이제 조금씩 힘들어하고, 내 어깨도 무거운 배낭 때문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끝청을 넘는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이 눈앞에 나타난다. 바로 저 멀리 공룡능선 너머로 시퍼런 동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게 아니겠는가? 중청을 넘어서니 더 가깝게 느껴지는 동해바다와 속초 시내의 풍광이 언젠가 사진 속에서 보았던 지중해 인근의 어느 아름다운 해변이 떠오른다. 그런 곳에 가본 적은 없지만, 해발 1500미터쯤 되는 곳에서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는 감동을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설악산을 여러 번 찾아서 설악이 예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멋진 모습까지 가지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마 오늘 처음 설악산을 찾은 여자 친구도 힘들기는 해도 설악산의 아름다움에 많이 감탄했을 것 같다.
중청을 지나 한계령을 출발한 지 6시간 만에 중청대피소에 도착한다. 짐을 내려놓고 대피소 밖에 나오니, 서북능선 너머로 내려앉는 붉은 태양이 또 한 번의 아름다운 장관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일몰을 보고 나서 어떤 재료를 써서, 뭘 만들어도 최고의 음식이 되는 대피소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일출을 보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아침 평소 같았으면 깊은 잠에 빠져있을 이른 새벽에 깨어 아침을 해 먹고, 대청봉에 오른다. 중청대피소에서 대청까지는 20분 정도 걸리는데, 정상에 조금 못 미쳐 동해바다 위로 빨갛게 태양이 떠오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저 먼 동해바다 위로 떠오르는 태양. 하늘과 바다, 육지와 강, 사람과 산, 이 세상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이 참 감동적이다.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맞이하는 일출이라서 더 감동적으로 느껴지도 모르겠다.
일출을 감상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내려갔지만, 설악산 대청봉에 추진하고 있는 케이블카를 반대하는 종이 피켓을 잠시 들고, 사진을 찍는다. 아주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대청봉 정상석 기준으로 서쪽은 강풍에 체감온도가 영하 15도 정도이고, 해가 떠오르는 동쪽 사면으로는 바람 한 점 없이 체감온도가 영상으로 따뜻하다. 정상의 멋짓 풍광에 더 빠져있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을 내려서서 뒤돌아본 대청봉은 짙은 파랑 하늘 속에 던져져 있다.
오색으로 내려가는 길은 등산객이 많지는 않지만, 급한 경사면을 따라 생긴 등산로는 훼손이 좀 심하다. 그래서 이쪽 구간으로 케이블카를 설치한다고 하는데, 정말 이렇게 숲이 우거지고 산새가 사는 한적한 산에 시끌벅적거릴 케이블카 계획이라니... 참 비현실적인 계획으로 생각된다. 자신이 만드는 기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관심 없는 기술자, 과학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공학적으로야 가능하겠지만, 설악산을 봐서도,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 산새, 곤충, 나무, 풀을 생각해서도 케이블카는 절대 안 될 일이다. 훼손된 등산로는 다른 방법으로 복구하고, 적절하게 등산객을 통제하면 될 텐데, 등산객을 통제하지는 않고 관광수입에 눈이 멀으니 엉뚱한 케이블카 계획이 툭 튀어나온 게 아닐까 싶다.
눈 아래 있던 점봉산이 어느새 시선 위로 올라가고, 한계령 보다도 더 아래로 하산한다. 내려갈수록 아쉬움은 있지만, 아쉬움이 추억으로 가슴속에 새겨지겠지. 오색 일대 상가도 몇 채 되지 않는데, 그 구역 대부분은 호텔이 차지하고 있다. 호텔을 다른 용도로 잘 활용하면 주변 일대 상가가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넓은 오색 일대를 숙박시설인 호텔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니, 나머지 부분은 그냥 오가는 사람들만 바라보는 식당을 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 보니 경기가 나빠져서 케이블카 라도 유치하고 싶은 심정이 아닐까? 오색 주민들과 상가가 힘을 합쳐 공동체를 이루면 다른 대안이 있을 텐데, 왜 케이블카만 고집하게 됐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오색에서 버스를 타고 창밖을 보니 주전골, 흘림골이 보인다. 하산길에 멀리 보이던 모습보다 가까이에서 보니 훨씬 예쁘다. 아름다움에 입이 벌어지면서도 이 공간을 버스를 타고 지나는 상황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요상한 바위, 봉우리, 계곡의 지형이 자연의 예술 공간이 되었더. 문득 든 생각인데, 앞으로 홍천-양양 고속도로가 생기면, 한계령 찻길을 막고, 걷는 길로 활용하면 관광객이 더 많이 질 것 같다. 그렇게 하면 한계령을 찾는 당일 관광객은 줄어들겠지만, 한계령을 걸어서 넘으면 옥녀탕-장수대-한계령-흘림골 상류-주전골(오색)로 이어지는 구간이 아주 아름다운 구간이라, 1박 2일 주말 트레킹 코스로 상당한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계령 휴게소는 이제는 산장 겸 대피소로 사용하고, 침체된(됐다고 주장하는) 오색 일대도 활기를 찾을 것이다.
다음에 다시 설악을 찾는 그날까지 인간의 탐욕의 때를 덜 타고, 지금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 사랑도 설악산만큼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산행지 : 설악산 (1708m. 강원도 인제, 속초, 양양)
날짜 : 2010년 2월 6~7일
날 씨 : 맑음
코 스 : 한계령-서북능선 갈림길-서북능선-끝청-중청대피소(1박)-대청봉-오색
일 행 : 개똥이, 먼발치에서, 나비, 맑은물
산행시간: 한계령-중청대피소(6시간 30분), 중청대피소-오색(5시간 30분), 총 12시간.
교 통 : 동서울-양양 간 시외버스 이용 (원통 등 경유)
[포토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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