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 00:36ㆍ산행일기
한국에서 해발 1000미터의 산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해발 1000미터가 넘는다고 모두 명산은 아니지만, 일단 1000미터가 넘으면 고산이라고 불릴 수는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문자답해 보지만, 명산이나 고산 산행에 대한 욕심을 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자기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을 오르고 싶었고, 마침 아내로부터 광복절 하루 육아휴가(?)를 받아 경기도 가평 쪽의 해발 1000미터 산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산행모임에서 활동할 때는 산에 가고 싶으면 친구들을 수소문하여 함께 가곤 했는데, 요즘은 산행모임 활동을 하지 않아서, 딱히 같이 갈 친구가 없다. 그래도 1000미터 넘는 산을 혼자 갈 수는 없어서, 전 직장동료 JM에게 연락하여 함께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큰 산행이고, 아직 휴가철이 끝나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집에서 이른 시간 출발하여 상봉역에서 7시 56분 춘천 가는 전철을 탄다. 청평을 지날 때까지 연인산과 명지산을 두고 목적지를 결정하지 못했지만, 청평역을 8시 30분에 지나니 명지산도 갈 시간이 될 거 같아 가평역까지 가서 8시 40분쯤 내린다. 가평역에서 가평터미널까지 걸어가는데 이른 아침 햇살이 무척이나 뜨겁다. 5분 정도 예상한 거리가 20분이나 걸린다. 택시 탈 걸......
가평터미널에서 9시 30분에 출발하는 용수동행 버스는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배낭들이 벌써 길게 줄을 서 있다. 잠시 후 마을버스 크기의 작은 33번 버스가 도착하자 눈대중으로 90~1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버스를 타려고 몰려들었다. 결국은 그 작은 버스에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 탔다. 정원을 심각하게 초과한 불법운행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가평 읍내의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주민들을 태우지 못하고 지나치는데, 내 귀를 의심하고, 이 시대를 비관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할머니, 여기 자리 없어요! 1시간 기다렸다가 다음 버스 타요!"라고 짜증 내듯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정말 한 사람도 더 태울 틈마저 없었던 것은 맞지만, 한 시간에 한번 다니는 버스를 못 타면 할머니는 한참을 또 기다려야 하는데 어찌 그런 생각을 하고 또 부끄러움도 없이 그것을 내뱉는단 말인가? 그런 철면피 승객과 비슷한 목적으로 같은 버스를 타고 있는 내 처지가 참 부끄럽고 스스로 참 민망했다.
힘들게 도착한 명지산 주차장은 생각보다는 여유가 있다. 주차장을 떠나 명지계곡(익근리계곡)으로 들어서니 훨씬 더 한산하다.
명지계곡을 옆에 두고 걷는 길은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고, 계곡의 찬 기운은 더위를 식혀주고, 계곡에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어서 여름에 잘 어울린다. 승천사를 지나고 등산로가 한번 가팔라질 무렵, 명지폭포 안내판이 보인다. 계곡 아래로 50미터를 내려가야 하지만, 명지산에 와서 명지폭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내려가 보니, 대단한 절경이다.
깊은 계곡에 높은 폭포는 깊은 소를 만들어내서 차가운 기운을 만들어 내고 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푸른 소에 새하얀 폭포수가 떨어진다. 하얀 계곡물이 떨어지는 만큼, 차가운 입자들이 피부에 달라붙어 더위를 빼앗아 간다. 명지폭포의 찬 기운을 받고, 등산로로 돌아와 다시 산행을 시작한다.
명지폭포를 지나고부터는 경사가 조금씩 급해지고,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계곡을 감싸고 있는 높은 봉우리는 안개구름에 싸여 보이지 않는다. 걷다 보니 어느새 명지 1봉 정상 회귀 갈림길에 도착하는데, 여름 계곡길을 좀 더 걷고 싶어 다리를 건너 직진한다.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제법 비처럼 내려서 큰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한다. JM은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잠시 후 비는 어느 정도 그쳐서 그냥 오르기로 한다. 안개비는 계속 내렸지만, 이렇게 높은 여름 산을 오를 때는 안개비 정도는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작은 폭포를 지나고 계곡을 두어 번 가로지르고부터는 물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등산로가 가팔라진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탄력으로 올랐지만, 나무계단도 계속해서 나오고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발걸음은 느려진다. 찌는 더위는 없지만 100%에 가까운 습도에 얼굴과 등에 땀이 비오듯 흘러내린다. 오랜만에 여름산에 왔음을 제대로 느낀다.
한동안 낮은 산을 힘들지 않게 다니면서 한걸음의 의미를 잊고 있었는데,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는 발걸음의 무게와 소중함을 절실히 느낀다. 다리와 어깨에 느껴지는 묵직함, '해발 1000미터 넘는 산은 힘이 드는구나'.
그래도 등산로 옆으로는 여름 야생화도 많이 피어 있어서 힘든 가운데 기운을 낼 수 있다. 무엇보다 습한 여름 숲에서 느껴지는 자연의 기운은 여름 산을 찾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한걸음 한걸음 옮기다 보니 이내 명지 1봉-2봉 갈림길을 지나 명지산의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발 1275미터 명지 1봉에 도착한다. 작은 바위 암봉인 명지산 정상은 안개가 비처럼 몰아친다. 안개가, 아니 구름일지도 모르는 물방울들이 눈앞을 빠르게 지나간다. 산 정상에서 느끼는 눈의 시원함은 없지만, 온몸이 시원해서 좋다.
명지 1봉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명지 2봉으로 향한다. 안개비가 계속 내려 주변의 경치가 보이지 않으니 눈앞의 초록 등산로만 바라보며 걷게 된다. 명지 2봉 까지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50분 정도가 소요된다. 중간에 휴식공간이 있으면 점심을 먹고 갈려고 했으나, 명지 2봉에 도착해서야 점심을 먹는다.
명지2봉 정상에서 점심을 먹을 겸 오늘 산행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쉬다가, 다시 명지 3봉을 향해 출발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명지 2봉 갈림길로 돌아왔더니 역시나 우리는 익근리 계곡으로 돌아가는 길로 가고 있었다. 안개비 내리는 산속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정할 때는 심사숙고해야 함을 다시 한번 되뇐다. 잘못하다가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전혀 엉뚱한 곳에 도착하게 되어,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명지 2봉에서 명지 3봉까지는 쉽게 도착한다. 명지 3봉에 도착하니 안개비가 그치고 서서히 날이 개기 시작한다. 명지 3봉에서는 귀목고개를 거쳐 내려가는 길과 아재비고개를 거쳐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계곡에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재비고개 방향으로 하산한다.
아재비고개로 내려서는 길은 명지산에서 연인산으로 이어지는 방화선 길임에도 불구하고 인적이 드물어서 그런지, 억새가 어지럽게 자라고 있어서 내 발이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안개구름 속을 빠져나와서 억새가 젖어 있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조금씩 하산할수록 날씨가 조금씩 개니까 맞은 편의 연인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상판리 넘어 한북정맥 청계산의 뾰족한 봉우리도 눈에 들어온다.
계속해서 연인산을 바라보며 내려가다 보니, 아재비고개 도착이다. 직진하면 연인산으로 대종주를 할 수 있지만, 상판리 방향 아재비골이 우리가 갈 길이다. 아재비고개에서는 명지산 정상을 오를 때 처음 지나쳤던 5명의 등산객을 만났는데, 계속 비슷한 속도로 등산을 하면서 다시 만나니 왠지 모르게 반가웠는데, 목을 축일 수 있는 음료수까지 주신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원시림이 우거져있는 아재비골로 내려가는데, 골짜기를 따라 희미한 등산로는 계속 이어져있어 하산길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시간은 어느새 3시 30분을 넘기고 있다. 4시에 상판리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에는 물리적으로 힘들 시간이고, 무리해서 서둘다가 발목이라도 삐끗하면 안 될 것 같아 4시 버스 포기를 선언한다.
조금 더 여유 있는 일정을 선택하니, 아재비골 하산길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입추를 지나고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어가는 햇빛을 간직하기 위해 나뭇잎들이 더욱더 초록색으로 빛을 내는 것 같다.
여름 산에 온 만큼, 계곡 물놀이는 필수 코스. 계곡 옆 길을 걸으며 괜찮은 물놀이 장소를 물색해 보지만, 아무리 인적이 드문 산이라고는 하지만 등산로 옆에서 물놀이를 할 수는 없어서, 계속 계곡을 감상만 하다가 명지 3봉에서 내려오는 골짜기에 풍덩 들어가니, 여름 내내 몸에 쌓여온 더위가 중금속 빠져나가듯 배출되는 기분이다.
상판리에 버스 종점에 도착한 시간은 4시 40분. 현리 콜택시를 부르고, 상판리 마을회관까지 걸어가면서 뒤를 돌아보니 명지 3봉은 보이지만, 그 뒤쪽은 아직도 안개구름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습한 기운에 온몸이 젖었을 때는 더위라고 느껴졌었는데, 산을 내려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은 시원함이라는 착각이 든다. 시원한 기운에 온몸이 싸여있던 그곳이 그리워졌다.
산행지 : 명지산 (경기도 가평 1267m)
날 짜 : 2013년 8월 15일
날 씨 : 산은 흐리고 안개비
산행코스 : 익근리 계곡 - 명지폭포 - 명지산(1봉) - 명지 2봉 - 명지 3봉 - 아재비고개 - 골짜기 - 상판리 버스종점
산행시간 : 6시간 20분 (10시 20분 ~ 16시 40분)
일 행 : 맑은물, JM
교 통 : 경춘선 가평역, 가평터미널 시내버스, 현리 버스터미널에서 1330.
[포토 산행기]
'산행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록 숲이 잊혀지지 않는 용문산 산행 (2015.6.6) (0) | 2015.06.27 |
---|---|
늦겨울에 찾은 치악산은 한겨울 (2014.2.15) (0) | 2014.02.16 |
강원도 오지 산행, 영월 시루산(2013.7.26) (0) | 2013.07.31 |
송전탑에 사로 잡힌 푸르른 양평 청계산 (2013.6.30) (0) | 2013.07.06 |
신선의 겨울 정원이 펼쳐진 양평 백운봉 (2013.1.19) (0) | 2013.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