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27. 00:00ㆍ산행일기
한창 귀여움이 자라나는 28개월 딸에게 '아빠는 오늘 산에 갔다 올게~'라고 하니, '아빠! 다녀오데요'라고 인사를 한다. 같이 놀지 못하게 되어 미안했지만, 다음 주부터 한동안 토요일에 딸과 둘이서만 보낼 수 있으니, 오늘은 혼자 집을 나선다. 서울 상봉역에서 전 직장 후배를 만나, 중앙선 전철을 타고 용문역에 도착한다.
용문역에서 버스터미널까지 10여분을 걸어 11시 30분 용문산행 버스를 탔는데, 버스는 용문역에 들렀다가 용문산으로 간다. 버스 노선을 알았더라면 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가지 않았을 텐데..... 버스에는 장을 보고 돌아가는 주민들, 휴일을 맞아 여기저기 다니는 학생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외부에서 찾아온 등산객들이 가장 많다. 등산객과 주민들이 나누는 대화는 모두 메르스(중동-급성 호흡기 증후군)와 관련된 것이다. 버스 안에 메르스 바이러스는 없지만, 메르스 소문, 메리스 말, 메르스 뉴스, 메르스 걱정은 가득하다. 하지만, 방송이나 언론에서 얘기하듯 큰 공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버스는 15분 만에 용문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한다. 용문사 입구에는 휴일을 맞아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많은데, 특히 엄마 아빠와 나들이 나온 어린아이들을 보니 집에 있는 딸내미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용문산 겨울산행을 했던 7~8년 전에 비해서 더 번잡해진 상가를 가로질러, 해탈교와 일주문을 지나 숲이 만들어 놓은 그늘에 들어서니 시원하다.
계곡을 따라 20분 정도 걸어 올라가 만나는 용문사에는 몇 년 전에 보이지 않던 건물들이 몇 채 보인다. 1000살을 넘은 은행나무도 여름에 보니 건강해 보이고, 더 웅장해 보인다. 용문사를 지나고부터는 제대로 된 산길로 들어선다. 오늘은 여름이니 만큼 능선길 대신 계곡을 따라 마당바위를 지나는 길을 선택한다. 능선길은 예전에 용문사 뒤편에서부터 능선을 타고 힘들게 올랐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에 더 피하고 싶다. 5월부터 가뭄이 심해서 계곡물은 많이 줄었지만 계곡 옆 숲은 짙푸르게 우거져있다. 졸졸졸 흐르는 계곡이 정감이 있다. 2007년 1월 용문산 산행 시, 꽁꽁 얼어붙은 이 계곡으로 내려온 기억은 있지만, 지금 걷는 길, 지금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여서 연상이 되지는 않는다.
등산객들이 많이 앉아있는 마당바위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고부터는 계곡을 멀리하고 가파른 길이 시작된다. 계곡길에서 정상을 오르는 능선길까지 올라가는 길이라서 꽤 가파르지만, 오늘따라 바람은 시원하고 온갖 산새들이 노래를 불러서 힘든 줄을 모르겠다. 길 옆의 다람쥐와 도마뱀에게도 인사하는 여유를 부려본다.
용문사에서 올라온 능선길에 오르니 제법 많은 사람들을 마주친다.
'용문산이 이렇게 인기 있는 산행지였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용문산을 오르고 있다.
계단과 암릉길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능선길은 마치 설악산 한계령에서 서북능선을 오르는 길 같은 느낌이다. 다양한 산새 소리도 산행을 즐겁게 해 주고, 시시때때로 불어오는 산바람도 시원한 산행을 돕는다.
남자 2명이 산행하다 보니 쉬는 시간이 적어 주차장을 출발한 지 2시간 만에 용문산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에서 조망은 최고다. 남쪽으로는 용문면 일대의 포근한 능선이, 동쪽으로는 중원산, 도일산과 움푹 꺼진 계곡이, 서쪽으로는 백운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그 뒤로 어렴풋하게 남한강이 조망된다. 북쪽으로 조망은 군사 시설물에 막혀있지만, 나머지 방향 조망으로도 충분하다. 정상에서 내려와 남서쪽 백운봉 갈림길 근처의 나무데크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시원한 초록나무 그늘 아래서 먹는 점심이 맛있다.
점심을 먹고 나서 곧바로 용문사 주차장으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어 백운봉 방향으로 산행을 더 하다가 장군봉에서 상원사로 내려가기로 한다. 갑자기 선택한 길이지만, 백운봉 가는 길은 최고다. 짙게 우거진 6월의 숲, 검은등 뻐꾸기를 비롯한 산새들의 아련한 소리, 나무를 흔드는 시원한 바람, 곳곳에 피어 있는 풀 꽃과 나무 꽃. 빽빽한 나무 사이로 가끔 산 아래가 보일 때 느껴지는 1000미터 산의 고도감. 햇살에 비춰 더욱 샛초록으로 보이는 나무들... 천국으로 가는 초록길을 걷는 기분이다.
장군봉까지는 이어지는 초록길은 자연이 살아 있고, 오르내림도 심하지 않아, 걷기 좋다. 용문사와 정상을 오르내리는 길이 주등산로가 되다보니, 장군봉, 백운봉 능선 길은 한적하다. 장군봉에 도착하니 더 욕심이 생겨 백운봉까지 종주하고 싶지만, 함께 간 후배가 하산을 원해서, 상원사 방향으로 내려간다.
능선에서 계곡으로 떨어지는 하산길은 꽤 가파르고 험해서, 한참 내려왔더니 발바닥에 후끈후끈 달아 오른다. 멀리 녹음이 우거진 상원사 계곡에서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검은등 뻐꾸기의 소리는 아련하고 몽환적이다. 한참을 내려와 도착한 상원사는 중간 정도 크기의 사찰인데, 최근에 증축을 한 듯 여기저기 공사 흔적이 남아 있고, 무엇보다 대리석을 쏟아부어 주변 자연과 조화에 실패하고 있다. 산속에 있는 만큼 친환경 건축을 고민하는 증축이면 좋으련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산속의 사찰도, 도심 속의 교회처럼 건물규모 경쟁에 빠져있는 것 같다.
상원사 앞길은 포장길이라, 곧 산행이 끝날 줄 기대했는데, 계곡을 따라 1시간을 더 내려간다. 계곡은 유명계곡에는 못 미치지만, 수량도 풍부하고, 숲도 우거지고, 곳곳에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 여름에 오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계곡과 마을이 만나는 지점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에는 상원사길이 사유지라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설령 사유지 길이라고 해도, 야박함이 먼저 느껴진다.
사유지 길이라고 해도, 계곡은 공유지라서 주변 땅 소유자가 계곡을 막는 것이 오히려 불법이다. 차라리, '여름철 계곡 관리를 위해 청소비를 받겠습니다'라고 하면 이해가 갈 텐데.... 사람들이든, 종교든, 현세의 사유재산에 영혼을 빼앗기고 있다.
조금 더 마을길을 걸어 내려와 연수리 종점에서 버스를 타고 용문역까지 나왔는데, 전철이 눈 앞에서 떠난다. 아깝다.
20분을 기다려 다음 전철을 타고 서울 집으로 돌아온다. 경기도의 큰 산, 용문산의 큰 기개와 초록기운을 마음에 담은 것 같아 뿌듯하다.
산행지 : 용문산 ( 1157m, 경기도 양평)
날 짜 : 2015년 6월 6일
날 씨 : 맑음
산행코스 : 용문사 주차장 - 용문사 - 마당바위 - 능선 - 용문산 정상 - 갈림길 - 장군봉 - 상원사 - 연수리(연수천)
산행시간 : 5시간
일 행 : 2명 (맑은물, 제이)
교 통 : 중앙선 용문역 - 버스
[포토 산행기]
'산행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의 끝이 남아 있는 선자령 (2016.2.27) (0) | 2016.03.20 |
---|---|
경남 고성의 진산, 거류산 (2015.10.10) (0) | 2015.10.25 |
늦겨울에 찾은 치악산은 한겨울 (2014.2.15) (0) | 2014.02.16 |
가평 익근리에서 상판리로, 명지산 여름산행(2013.8.15) (0) | 2013.09.01 |
강원도 오지 산행, 영월 시루산(2013.7.26) (0) | 2013.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