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9. 21:45ㆍ북한산특집
봄 산행을 떠나고 싶어 마음이 근질근질하다. 3월의 고온현상으로 일찍 피었던 벚꽃이 떨어지고, 초록잎이 나오기 시작하니 산행바람이 난 것 같다. 혼자는 심심해서 아이에게 백운대에 가자고 했더니, 의외로 같이 가겠다고 한다. 토요일 밤, 아이의 마음이 흔들렸으나, 일요일 아침 예정대로 아침 일찍 집을 나서 경전철을 타고 우이동으로 이동한다.
일요일 아침 우이신설 경전철은 유럽 산악열차와 같은 느낌이 든다. 승객의 90%는 등산복 차림, 고요함이 흐르는 조그만 경전철 안, 타인을 배려하며 소곤소곤 얘기하는 등산객들. 조용한 가운에 활기찬 기운이 흐르는 유럽 산악 열차를 타는 상상도 나쁘지 않다. 상상은 언제나 공짜고, 자유다.
우이역에 내려, 등산용품점으로 가득 찬 상가지구는 예전과 달라진게 없지만, 만남의 광장 위쪽으로는 보행로를 포함하여 주변 환경이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소귀천계곡이 갈라지는 선운교에서도 자동차길과 사람길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도선사 입구까지 이어지는 아스팔트가 싫어 우이동에서 오르는 길을 멀리했더니, 10여 년 만에 우이동으로 산행을 한다. '옛날에는 여기가 OO 했는데...'라는 생각이 가득한걸 보니 나도 이젠 옛날 산행인이 되고 있다.
선운교 갈림길에서 데크길로 오르다가 개나리산장 옆에서 자동차 길을 다시 만난다. 사람길은 찻길과 완전히 분리되어, 옆쪽 우이천계곡을 보며 걷기 좋다. 아직 남아 있는 벚꽃과 초록 잎사귀와 아침햇살이 만나는 신비로운 색감은 검은 글씨로 표현이 안된다. 주중에 내린 많은 비에 존재를 알리는 시끄러운 물소리, 상쾌함이 느껴지는 기온까지 어우러져 우이천 계곡에는 청량함이 가득하다. 무릉도원 같은 분위기에 아이도 신이 났다. 이 아침 우이천계곡은 다 좋지만, 우이구곡 8경 안내판이 설치된 옥경대, 만경폭등은 특히 더 아름답다.
우이천계곡을 뒤로하고 도착한 도선사 입구 건물은 상가가 없어지고 불교대학이 되어 있다. 달달한 간식을 준비하지 못한 아이와 나는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산들바람처럼 시간이 흘러갔다. 계곡물처럼 시간이 흘러갔다. 지난 시간 산행의 추억이 좋지만, 흘러간 추억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지금 산행하는 아이와 현재 이 시간을 즐긴다.
탐방안내소를 지나고부터 데크 없는 산행길이 시작되는데, 일명 깔딱고개로 불리기도 하는 하루재 경사는 옛날 그래로다. 숲이 더 우거졌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숲도 나무도 많이 없어 햇살이 뜨겁다. 이름과 달리 이 깔딱고개는 숨이 넘어갈 정도는 아니다. 어느 산행에서나 만나는 조금 가파른 등산로 정도라, 아이와 천천히 오르다 보니 어느새 인수봉이 저 멀리 보인다. 하루재에서부터 진달래가 화사하게 피었는데, 그중에서도 인수봉을 배경으로 핀 진달래는 풍광을 즐길 줄 안다. 인수봉대피소, 등산장비 대여소를 지나 개가 드러누워 자는 인수암을 지난다. 개가 사찰에서 자고 있으면, 속세의 사람들은 해탈한 개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냥 낮잠을 즐기는 개일뿐이다.
한동안 졸졸졸 개울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오른다. 아이와 개울물에 손을 담그니 꽤 차갑다. 개울과 등산로 옆 곳곳에 노랑제비꽃, 제비꽃, 양지꽃, 현호색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이 작은 개울은 사실 은평뉴타운 옆으로 하여 고양시를 흐르는 창릉천 발원지이다. 이제는 폐쇄된 백운산장 앞마당은 여전히 쉼터로 남아 있다. 아이와 산장과 유령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위문(백운봉암문)까지 오른다.
서로 다른 시작점에서 출발한 등산객이 백운대 정상에 가기 위해 모이는 곳인데, 등산로가 좁아져 병목현상이 발생하는 구간이다. 암릉길이 시작되는 초반에 두어 번 정체됐지만 우려와 달리 지체된 시간은 길지 않다인. 급한 바위구간을 오랜만에 왔더니 조금 아찔함이 느껴진다. 나뿐만 아니라 앞에 가는 아이의 발걸음이 조마조마했는데, 곧 익숙해지고 편안함이 느껴진다.
백운대 정상부근까지 추가로 막히는 곳은 없었는데, 정상 바로 아래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좁은 백운대 정상을 오르기 위한 단순한 정체인 줄 알았더니, 정상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줄이었다.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지만, 아이와 백운대까지 왔으니, 30여분을 기다려 대망의 백운대 정상 도착한다. 사방이 확 트였지만, 오늘 공기질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어서, 시야가 3~5km 정도 되는 것 같다. 바로 뒤 청년들에게 부탁하여 사진 기록을 남긴다.
사진보다 소중한 아이와의 산행 추억이 영화 한 장면처럼 쑥 지나간다. 3살 무렵 형제봉 둘레길, 5살 450미터 형제봉정상, 8살 때 북한산성과 칼바위 정상(해발 약 600미터)을 차례로 올랐던 아이. 칼바위도 무난히 올랐으니, 이제 북한산 정상 백운대를 가자고 했더니, 백운대는 무섭다고 한동안 거부했었다. 그러다가, 올해 2월,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선자령을 올라 자신감을 쌓더니, 이번에는 흔쾌히 백운대에 가겠다고 하고, 올라오며 힘들다고 전혀 투정하지 않고 올라왔다. 아이들에게는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는 때가 온다는 사실을 지난 산행과정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대견한 아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백운대 정상 바로아래 너른 바위에서 점심으로 준비한 김밥을 먹는다. 아이는 집 앞 가게에서 파는 이 김밥이 가장 맛있다고 한다. 따뜻한 봄 햇살을 쬐고, 봄바람도 맞으며 쬐고, 이 높은 산 정상에서 까마귀의 바람 타기 묘기를 보며 여유를 즐긴다. 산 정상은 산 아래와 구분되는 공간이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산 아래 번잡한 삶과 잠시 동떨어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기에 산 정상을 찍고 바로 내려가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더 오래 앉아있다가는 사람들도 더 많이 올 것 같고, 가야 할 길이 멀기에 바위에서 일어나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올 때 많이 막혔던 구간이 내려갈 때는 덜 막힌다.
외국인 등산객이 암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I am King of the world'라며 신나게 외치기에, 따라 했더니 손뼉 치며 엄지 척을 해준다. 자신감이 필요하다.
백운봉암문을 통과하여 북한산성으로 가기 위해 만경대 아랫길로 들어선다. 백운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조망만큼이나, 이쪽 만경대 아랫길에서 올려다보는 백운대 기암절벽의 절경은 최고다. 오늘은 진달래까지 피어있으니 금사첨화의 풍광이다. 아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작은 암벽길로 들어섰다 내려섰다 반복하며 걷는다. 앞쪽으로 보이는 노적봉 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이 보이는데, 우리는 위험구간인 노적봉은 그냥 지나치고 용암문 방향으로 향한다.
산행시작 4시간을 넘어서니 무릎에 살짝 통증이 느껴진다. 미리 준비한 스프레이 파스를 뿌리고, 무릎보호대를 착용하니 통증이 줄어든다. 용암문에서 북한산성을 만난다.
용암문을 지나 일출봉 오르는 길에서 바라보는 용암봉-만경대-인수봉은 북한산성과 멋지게 잘 어울린다. 매우 시끌벅적하게 사진을 찍는 10여 명의 단체 산행객을 뒤로하고 아이와 다시 조용한 북한산성길을 걷는다. 오후가 되어 남서쪽으로 넘어간 햇살이 진달래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세상 만물, 현상, 사람, 마음....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주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냐에 따라 다른 존재가 된다. 주변은 나의 변두리가 아니라 대등한 이웃이다.
달달한 간식을 준비하지 못했지만, 집에서 챙겨 온 과자를 아이와 나눠먹으며 북한산성을 걷는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인데, 체력이 점점 떨어진다. 멀게만 느껴졌던 북한산성 지휘본부 동장대가 눈앞에 있다. 약간 손상된 곳이 있어 수리할 예정이라고 한다. 동장대를 내려와 북한산성을 따라 대동문에 도착한다. 한때 북한산성 코스로 산행하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던 곳인데, 지금은 대동문 수리공사를 하고 있어서 많이 한적하다. 대동문에서 진달래가 아름다운 진달래능선으로 갈 수 있지만, 우리는 진달래가 활짝 핀 북한산성을 따라 칼바위능선 갈림길을 지나 보국문으로 간다. 보국문도 대동문과 함께 문화재수리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보국문 옆 언덕에서 저 멀리 백운대-만경대-노적봉을 바라보니, 참 먼 길을 왔다. 저기에서 여기를 볼 때는 언제 가나 싶은데, 거리를 잊고 걷다 보면 어느새 나는 그곳에 도착해 있다. 미래를 보면 먼 것 같지만, 되돌아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있다. 산행과 달리 인생은 더 많은 변수들이 있어, 꾸준히 가면 된다는 기본을 잊곤 한다. 산행처럼 인생도 꾸준히 가자.
보국문을 나오고부터는 계속 내리막길만 가면 되지만, 바위가 많은 북한산은 내리막길이 육체적으로 쉬운 것만은 아니다. 다행히 무릎통증이 사라지고, 꽃을 계속 볼 수 있고, 옆에는 재잘재잘 아이가 있으니 즐거움이 더 많다.
언제나 끊이지 않는 쌍샘약수터 물은 비가 온 뒤라 더 시원하고 맛있다. 몸에 미네랄과 에너지가 꽉 차는 듯한, 훌륭한 플라세보 효과를 가진 샘이다. 50년 이상된 참나무들이 살고 있는 청수계곡 상류를 내려오면 넙적바위가 있는 청수2교가 있는데, 이곳에서 하류는 계곡출입금지구역인 반면, 이곳 주변은 금지구역이 아니라 아이와 계곡물가에서 잠시 쉬며, 발을 담갔는데 물이 얼음장 같아서 10초를 견딜 수가 없다. 화끈해지며 벗겨질 것 같은 발바닥이 회복된 느낌이다.
산행시간 6시간, 계획대로라면 이제 산행을 끝내야 하는데, 아직 더 내려가야 한다. 계획보다는 늦었지만, 1시간 안에 산행이 끝날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 오후햇살과 신록이 만나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숲의 모습도 만날 수 있고, 초록과 분홍이 만나는 아름다운 청수계곡도 좋다.
익숙한 북한산 청수1교를 지나 북한산 주차장으로 나온다. 아이와 함께하여 더 재미있고, 더 의미 있고, 더 아름다웠던 북한산 백운대 산행을 마친다.
산행지: 북한산 백운대(836.5m)/ 서울, 고양시
날 짜: 2023년 4월 9일
날 씨: 맑음
일 행: 맑은물(아빠)과 아이
산행코스: 우이역-하루재-백운봉암문-백운대-만경대길-북한산성(용암문-동장대-보국문)-정릉 청수계곡
산행시간: 7시간 20분 (9시 30분~15시 50분)
교 통: 시점(우이신설경전철), 종점(도보)
[포토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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