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6. 9. 19:18ㆍ전국산행일기
청량리역을 떠난 지 4시간 만에 도착한 증산역에는, 어둠 속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차지한 역사 내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아침이 밝아오기까지는 아직 3시간이나 남았습니다.
새벽이지만, 불편한 역사 내부에서 잠이 오지 않는지 두어 명은 밖에 나가서 민둥산 안내지도를 보거나 날씨를 살피고, 두 명은 옷을 몇 겹 입고 의자에 앉아 잠들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잠깐 눈을 붙였을까. 라면먹자는 소리에 잠을 깨어보니 5시가 넘었습니다. 우리도 화장실 물을 끓여 아침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일행은 여덟 명인데 코펠과 버너는 하나 밖에 없어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보온병의 물로 컵라면에 부어 버립니다. 날이 밝아오기 전에 먹는 아침이라서 부담을 느낄 만도 한데, 컵라면 한 개를 후루룩 삼켜버리고 김밥도 있는 대로 삼켜 버립니다.
든든한 아침을 정리하고 민둥산입구인 증산초등학교로 출발했습니다. 잠시 멈추었던 이슬비가 다시 오기 시작합니다. 증산초등학교를 지나 민둥산으로 들어섰습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시간인데다가 비까지 내려 주위는 어두컴컴합니다. 30분쯤 올라가니 산 아래 마을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길을 조금씩 미끄러워졌지만, 그리 험한 산이 아니라 별문제 없이 오르막길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고랭지 채소를 위한 임도를 지나고 정상을 향해 가는데 길은 더 이상 그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육산인 민둥산의 등산로는 질퍽질퍽 하고 미끄러워서 모두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나무를 잡고 다리에 힘을 주고 길보다 덜 미끄러운 곳으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비만 오지 않았다면 금방 올라갈 거리 같았는데, 우리는 한참을 걸려 억새가 시작되는 곳까지 겨우 오를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잣나무 숲, 단풍 숲도 지났지만 억새가 시작되는 곳에 도착하니 민둥산, 말 그대로 나무하나 없는 억새평원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는 하얀 억새를 기대하고 떠났지만, 억새는 세찬 가을바람에 겨우 몸을 지탱하고 쓸쓸한 억새를 만났습니다. 비가 내리는 대로 억새밭은 운치가 있었습니다.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는 ‘쉬어가는 곳’이라고 적힌 움막이 3채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 비바람을 피하고, 불가피하게 술잔을 돌려 마시며 체온을 지켰습니다. 움막에서 민둥산 정상(1119m)까지는 한걸음에 올라갈 거리입니다.
증산초등학교를 출발한지 2시간 남짓 만에 정상에 도착할 정도로 그리 험한 산행 길은 아니었지만, 정상은 기온도 낮고 비바람이 너무 거칠어 오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에 날려갈 듯하면서, 카메라를 겨우 꺼내어 굽은 손으로 사진을 몇 장 찍고는 바로 하산합니다. 처음 계획은 25분 거리에 있는 지억산까지 갔다가 내려오는 것이었는데,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하산길은 비가 와서 올라올 때보다 더 미끄럽습니다. 사람들의 등산화에는 흙이 한 덩어리씩 묻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낮은 초원지대로 이루어진 길을 조심조심 내려가 고랭지 배추가 모두 뜯긴 텅 빈 밭을 가로질러 겨우 시멘트 포장길까지 내려갔습니다. 거기까지 차를 끌고 올라온 등산객들이 북적거립니다. 우리는 발구덕 마을을 지나 증산초등학교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 걸어가는데, 중간에 길이 끊어져 배추를 모두 수확한 진흙 밭을 지나기도 하고, 갓 공사한 비포장도로를 걷기도 하면서 겨우 안자고치 마을을 찾아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등산화뿐만 아니라 바지의 무릎부분까지 모두 흙이 튀었습니다. 밭고랑에 고인 물로 등산화에 묻은 흙만 겨우 씻어내고 증산초등학교로 향했습니다. 증산초등학교는 아침과 다르게 관광버스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 막 도착한 사람들의 등산화는 진열장에서 막 꺼낸 것처럼 깨끗했고 바지도 아주 깨끗합니다. 그 사람들 주위에서 우리는 괜히 어슬렁거리며 민둥산 안내지도를 보고 있으니, 사람들 몇몇이 와서 말을 걸어옵니다.
'비 오는데 올라가면 볼만해요?'
'글쎄요. 비가 와서 제대로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몇몇 사람들은 비때문에 산행을 포기하고 돌아가기도 합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산행 준비가 되어있고, 정말 갈 수 있는 사람만 올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그들이 타고 온 버스가 충남, 경기, 대구, 서울인 것을 볼 때는 그렇게 말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증산역으로 향하는 도중에 민둥산을 바라보니, 개미처럼 한 줄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민둥산의 입장이나,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입장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입장이나 안타까운 것은 마찬가지 였습니다.
민둥산은 억새꽃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정상의 평원지대, 고랭지 채소밭, 카르스트 지형에서 볼 수 있는 돌리네 등이 있어, 사계절 중 어느 때 찾아도 즐겁고, 가볍게 산행할 수 있는 산입니다.
산행지 : 민둥산 (1119미터, 강원도 정선)
산행일 : 2002년 10월 20일
일 행 : 8명 (오직한길, 호~옹, 먼발치, IF, 맑은물, 하나사랑, 2명]
날 씨 : 비
산행코스 : 증산역(민둥산역) - 능선 길 - 민둥산 정상 - 발구덕 마을 - 증산역
교 통 : 중앙선 이용
☞번잡함이 싫다면 아침 일찍 산행을 시작하면 호젓한 산행을 할 수 있다.
청량리에서 밤 11시에 출발하는 무궁화 열차를 이용하면 좋고, 자가운전 시 중앙고속도로 신림 I. C-402번 지방도로 - 주천 - 38번 국도 -영월 -증산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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