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후기 1(2003년 7월25일)

2003. 9. 30. 12:43산행일기

지리산 종주기 첫번째 이야기

(2003, 7, 25 / 수원 → 화엄사 → 노고단대피소 )



수원역 편의점에서 먹을것 몇 가지를 급하게 사들고, 등에는 40ℓ짜리 배낭을

메고, 구례구역으로 향하는 무궁화호를 탔다. 자리를 찾았는데, 내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항상 옆자리에 누가 탈까 기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편의점에서 샀던것들을 배낭에 넣는데, 배낭이 꽉 찼다. 아직 빠트린 준비물이

있어서 구례에 도착하면 또 사야 하는데, 짐을 너무 많이 챙긴것은 아닌가 걱정

이 되기도 한다. 오산, 평택, 천안을 지나 남쪽으로 달리는 기차안을 멍하게 있

다보니, 거대한 기계덩어리가 녹색 터널속을 달리는것 같은 착각이 든다.

창밖으로 가끔 지나는 하천, 도랑에는 밤새 내린비로 황토색 물이 흐르고 있

었다.



'나는 왜 혼자 머나먼 지리산으로 떠나는가?'

뒤늦게 의문을 가지고, 답을 해본다.

1.그냥 빨리 쉬고 싶었을 뿐이다. 몇달 정신없이 바쁜 생활에서 하루라도 빨리

휴가를 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2.6년전 무작정 찾았던 지리산, 산행 내내 비가 내려서 지리산의 모습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본 거대한 지리산을 다시 보고 싶었다.

3.홀로 산행길을 걸으면, 많은 생각을 하고 싶었다. 단독산행의 최대 장점이

아닐까 싶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는데, 익산을 지나고부터 갑자기 세찬 빗줄기가 내린

다. 다행히 남원쯤 도착하니 비는 그치고, 구례에 다가가니 비의 흔적은 커녕,

맑은 햇살이 섬진강 상류를 비추고 있다.


수원역을 출발한지 4시간 25분이 지난 12시 50분에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기차표를 떠나버린 기차에 놓고 내려 10분이 지체되어서 구례로 들어가는 버스

는 출발해 버렸다. 역 앞에서 몇 가지 빠트린것들을 산 다음, 택시를 타고 구례로

들어갔다. 택시기사는 혼자 화엄사로 가면 힘들기만 하니, 화엄사로 가지말고

성삼재로 가라고 하신다. 그러겠노라고 대답은 했지만, 화엄사코스를 이번에

안가면 또 언제 가겠냐는 마음이 생긴다.


구례읍내에서도 조금 시간을 지체해서, 화엄사 입구 주차장에는 오후 2시 20분

에 도착했다. 짐을 마지막으로 정리해본다.



코펠, 버너, 라면 2개, 컵라면 1대, 햇반 3개, 가스 2개, 쌀, 김치, 쵸코바 12개,
오렌지 4개, 팩소주 2개, 물통 2개, 수저 , 수첩, 책 1권, 카메라, 랜턴, AA 사이즈
건전지 5 세트, 맨소래담, 썬크림, 양말 2, 속옷 1, 면티 1, 더불어티1, 쟈켓 1,
긴바지 1, 반바지1, 담요 1, 판쵸의 1, 돗자리 1...등등..(역시나 짐이 많다.--;)


주차장에서 노고단 까지는 7km라 표시되어 있는 표지판과 매표소를 지난다.

화엄사까지는 20분정도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오른쪽으로 계곡물이 시원스레

흐른다. 시의동산, 자생식물관찰원도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다.


화엄사에 도착해서 절을 한바퀴 둘러보는데, 구경꺼리가 있는것은 아니고,

1500년 고찰의 전통스러움이 어딘가에서 느껴지는것 같다.

가져간 볼펜이 잘 나오지 않아서, 화엄사앞에 있는 반야다원에 들러 볼펜을

얻어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화엄사 앞 계곡에는 몇몇 사람들이 시원

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오후 3시 10분, 화엄사 입구를 출발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화엄사를 따라

쭉 올라가는 등산로는 대나무 숲이 인상적인데, 대나무가 너무 빼곡하게 자라

서 숲이라기보다는 대나무 터널에 가까웠다. 시원한 계곡 물소리에 취해 1km

정도 올라가다 보면 용이 승천했다는 용소가 나온다. 용소를 지나면 큰바위쉼

터가 있는데, 넓적한 바위가 있어 누워서 쉬는 사람들이 보인다.


햇빛을 가려주는 우거진 숲과 계곡에서 나오는 서늘한 기운, 물소리를 들으며

노고단을 향한 발걸음을 분주히 옮기다보면, 어진교, 어은교라는 다리가 나오

는데, 어은교 밑에서 손을 씻고, 세수를 하니, 아예 계곡 물속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생기기도 한다. 조금 올라가면, 연기암으로 향하는 길이 나오는데, 이곳

은 화엄사 입구에서 다리건너 난 찻길로(실제 차는 못다님) 올라오면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노고단이 5.0km 남은 표지판을 지나고 부터 참샘터, 국수등을 지날때는 마주치

는 사람도없이 계속 걷기만 한다. 경사가 그리 급하지도 않고, 바로 옆을 흐르던

계곡은 멀어졌다 가까워 졌다를 반복하는데, 이것은 산행길이
아니고, 침묵에 익숙해져야하고, 지루함에 익숙해져야 하는
수행길이자 고행길 같았다.

시원하게 느껴지던 계곡물소리도 단조롭게 느껴지고, 산새소리, 매미소리, 귓가

를 따라다니는 조그만 날파리 소리에 짜증이 나고, 심심함에 지칠때쯤 가파른 돌

계단을 10분정도 힘들게 올라가야 하는데, 그곳이 중재이다. 이제 노고단은 3km 남았다.



화엄사를 출발한지 2시간이 조금 안된시간, 경사가 조금 급해졌고, 가끔 사람을

마주치기도 한다. 계곡에는 집선대라고 하는 시원한 다단 폭포가 있어, 내려가

세수를 하고, 내려간김에 웃통을 벗고, 어깨를 씻고, 쵸코바로 뱃속을 채웠다.

피로도 풀리고, 몸에 힘도 나는것 같아, 오르막을 오르는데, 경사가 급한길이 이

어진다. 이곳이 너무 가팔라서 코가 땅에 닿는다는 코재인가 보다. 하지만, 실제

그렇게 급한길은 아니고, 또, 여기만 오르면 노고단 산장에 도착할 수 있다는 생

각이 있기때문에 오히려 힘들지는 않았다. 코재를 오를때는 장마끝이라 그런지,
오른쪽으로 시원한 물줄기를 내려보내며 오르게 되고,
바위속에는 '구륵구르르륵' 물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눈썹바위를 지나니 이제 노고단이 1.5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다. 마지막 힘을 내어 오르막을 힘차게 오르니, 생각보다

빠른 5시 50분에 성삼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제부터 노고단

산장까지는 넓은 길이라서 어려움이 없다. 100여 미터 오르면, 작은 물줄기를

화엄사계곡으로 바꾸기 위한 물넘기(물넹기)라는 곳을 지나게 되고, 노고단

산장을 500여 미터 남겨둔곳에 마지막일듯한 계곡물이 흐르고 있어,

대피소에서는 못 씻을것 같아 세수를 하고 땀을 닦았다.


결국, 주차장을 출발한지 4시간, 화엄사를 출발한지 3시간만인, 오후 6시 15분에
노고단산장(대피소)에 도착했는데, 산장 관리자가 반갑게 맞아 주신다.
4시간 정도면 정상적인 산행시간이지만, 화엄사 입구에서 20분정도를 허비해
버린것 때문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린것 같다.



자리를 배정받고, 취사장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저녁 메뉴는 신라면에 밥이다.

어딘가 어색했지만, 금세 익숙해 졌다. 저녁에 잠깐 화엄사 계곡에 안개가 걷히

기도 했지만, 서쪽하늘은 계속 흐려있어 일몰을 보지는 못했다.

저녁도 먹고, 소등시간까지는 2시간 가까이 남았다. 사람들에게 문자도 보냈다.

(하지만, 밧데리 용량을 고려해서 하지 말았어야 할 짓이었다.^^)

하도 심심해서 캐나다에서 외국 여성들에게 말을 걸었다.

작년 10월에 처음 왔었던 지리산이 너무 좋아 이번 휴가에 다시왔다고 했다.
내일 아침 일출을 볼 계획인 그들은 먼저 가고, 홀로 지리산의 정기를 안주삼아, 팩소주를 마신다. 산행 첫날은 예정대로 지나가고 있었다.






구례구역에 내리니 고온다습(?)했다.



매표소에서 화엄사로 (안개에 휩싸인 노고단이 보인다.)



화엄사



화엄사



시원한 화엄사앞 계곡



화엄사옆 산행길(대나무숲이 우거졌다.)



용이 승천했다는 용소



너른바위 쉼터



화엄사 계곡의 집선대



눈썹바위



코재를 올라 뒤돌아본 화엄사 계곡



노고단 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