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후기 4(2003년 7월27일)

2003. 10. 1. 20:59산행일기

2003년 7월27일 (장터목대피소 → 치밭목 대피소)



제석봉 주위에는 불에 탄 고사목이 많다.


새벽 3시 30분에 옆에서 자던 사람들이 바스락 거리며 내 잠을 깨우고 천왕봉으로 떠난다.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때문에 잠을 설쳐서, 그들이 떠난후 잠깐 잠들었나 싶었는데, 깨어보니 5시 30분 이었다. 허겁지겁 배낭을 정리하고, 천왕봉으로 향했다. 한 50m쯤 올라갔을까? 배낭이 가벼운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는데, 돗자리를 그냥 깔아둔체로 올라온 것이었다. 아침도 안먹었는데, 다리에 힘이 쭉 빠진다. 그렇지만, 버릴 물건은 아니라서 대피소에 내려가 돗자리를 챙겨서 다시 오르막길을 오른다.

장터목 대피소에서 천왕봉을 오를려면 우선 제석봉(1806m)을 올라야 한다. 제석봉 주변의 고사목은 자연적으로 죽은것이 아니라, 50여년전 나무를 자른것을 숨기기 위해 불을 질렀기 때문에 저런 앙상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석봉과 천왕봉 사이쯤에서 어제밤 같이 놀고, 옆에서 잤던 사람들을 만났다.
"일출 봤어요?"
"아니요, 안개만 봤어요. 형 산행 잘하세요"
"네, 다음에 산에서 한번 봅시다."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

그들을 내려보내고, 천왕봉을 오르는데, 이른아침인데도 온몸에 땀이 흐른다.
천왕봉에 오르면 추울것 같아, 대피소를 떠날때 반팔티, 긴팔티, 쟈켓을 껴입고 긴바지를 입었기 때문이다. 옷을 벗기도 귀찮아, 그냥 입고 잠시 쉬면서, 쵸코바를 꺼내어 한입 물었는데, 목이 매어 배어 물은것만 겨우 물과 함께 삼키고 나머지는 배낭속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통천문을 통과하여, 장터목대피소를 출발한지 1시간 만에 1915미터의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 도착했다. 천왕봉에는 역시나 안개가 자욱해 주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거센바람이 불어, 올라오면서 흘렸던 땀을 모두 식혀준다. 모자가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거세다. 천왕봉에는 1차 일출 산행객이 모두 하산한 다음이라, 아무도 없어서 마치 내가 제일 먼저 정상을 밟은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도착하고 뒤이어 바로 몇 사람이 천왕봉에 올라왔다. 천왕봉에 올라 기뻐하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한번 더 기분이 좋아진다.


지리산 정상 천왕봉 표석
정상표석 주위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데, 어떤 사람 둘이 내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한다. 기꺼이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사진은 이메일로 보내주기로 했다. 천왕봉 서쪽면은 바람이 거세지만, 동쪽 아래쪽은 바람이 불지 않았다.
바람을 피해, 동쪽으로 내려가니, 조금전에 사진을 부탁했던 사람들이 황도를 먹어보라고 권한다. 그들은 멀지 않은 '수원'에서 왔고, 오늘은 중산리로 하산한다고 했다. 그 사람들과 얘기 하면서 좀 있다 보니, 갑자기 안개가 걷히면서 해가 모습을 드러낸다. 비록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천왕봉에서 아침 해를 보니 가슴이 벅차왔다.
같이 얘기하던 사람들도, 지리산에 몇번 왔지만, 천왕봉의 아침해는 처음본다고 했다. 그만큼 천왕봉 일출이 어렵단 말인가?



천왕봉의 날씨는 변덕 스러웠다.


중산리-천왕봉 길, 상당히 가파르다.



일출은 아니지만 아침해가 떴다.


천왕봉에서는 한 40분가량 머물다가 중봉쪽으로 하산길을 잡았다. 쟈켓도 벗고, 바지도 반바지로 갈아입으니 시원한게 산행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중봉으로 가는길에서는 오랜만에 계곡물 소리가 들렸다. 6년전 길을 잃었던, 칠선계곡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다. 중봉으로 가는길은 사람이 많이 다닌것 같지는 않다. 갖가지 야행화가 한곳에 피어있는곳도 있고, 또 종달새는 누구를 유혹하기 위한것인지 뒤따라오며 울어댄다.


지리산은 야생화 꽃밭이었다.(천왕봉-중봉사이)


30여분만에 도착한 중봉(1874m)에서는 서너명의 중년의 산악회 회원을 만났는데, 혼자 산행하는 나를 보더니 대견하다며 어깨를 두들겨 준다. '내가 대견스러워 보일 나이인가? ^^'

중봉에서 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조심하느라고 했는데도, 두어번 미끄러지고, 발목도 두어번 삐끗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손, 발, 허리, 다리등 온몸으로 산행을 해야 되는데, 귀찮고 딴생각을 하면서 다리만 뻗어 발을 디디다가 미끄러진 것이다. 힘들수록 온몸으로 산행하는것, 작은 부상이라도 막기위해 명심해야 할 것이다.



끝내 지리산은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중봉)


써리봉에 이르기 전에 젊은 산행동호회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회원 1300여명에 이번 산행에만 48명이 참가한다고 한다. 젊은층으로 이루어진 산행객들을 만날때마다 같이 산행하는 사람들의 기억이 떠올랐다.


천왕봉에서 하산을 시작한지, 한시간 십분만에 써리봉(1602m)에 도착 했는데, 안개구름이 순간순간 걷히면서 천왕봉과 중봉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써리봉에서는 긴팔티를 벗고, 여벌로 준비해 속에 입고 있던 반팔티만 입었다.

써리봉 구간은 서너개의 작은 봉우리를 넘어야 하는데, 철계단이 잘 만들어져있어 지리산 종주길에서는 오히려 아기자기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구간이었다. 써리봉을 지나면서 부터 이제 더 이상 봉우리는 없다. 대원사까지 계속 내리막길만 내려가면 되는것이다.


지리산 종주길이 거의 끝나고 있는데, 나는 과연 지리산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 할수 있나? 지리산에 살고 있는 수천만, 수억, 아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 나무, 풀, 동물, 곤충들을 얼마나 알고 내려가고 있는가? 지리산 능선길을 종주하면서 알게된것은 단지 산행길이 어떻게 나있고, 대피소가 어디에 있는지 정도 인데, 지리산을 종주했다고 말하고, 지리산에 대해 안다고 말 할수 있을까? 나는 지리산을 종주했지만, 지리산에 대해서 아는것은 아주 적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특정한 집단이나, 대상, 물건, 인물들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비난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작은 야생화 하나로 지리산을 판단 할수 없듯이 겉으로 드러나는 작은 모습으로 사물을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황색, 청소부나 소방관들이 입는 옷색이다. 뒤쪽은 천왕봉(써리봉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치밭목 산장으로 내려가다가 또 두어번 미끄러졌다. 집중력을 잃지 말아야 되는데, 아무래도 배가 고파서 그런것 같다. 써리봉에서는 50분을 더 내려와 치밭목 산장에 도착해, 장터목에서 떠온 물로 햇반을 데우고, 또 햇반을 데운 물에 북어국을 끓여 먹여 아침을 먹었는데, 30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치밭목 산장의 샘은 뒷쪽으로 100미터를 가야 있다.

이제 아침도 먹었겠다. 대원사계곡을 거쳐 유평으로 하산 하면 지리산 산행이 끝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