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후기 5 (2003년 7월27일)

2003. 10. 1. 21:09산행일기

2003년 7월27일 / (장터목 →) 치밭목산장 → 대원사





치밭목 산장을 내려오면서 부터 물이 쪼르륵 흐르는 길이 시작됐다. 물이 흐르는 길은 계속 이어졌는데, 등산로인지, 계곡인지 명확한 구분은 없었다. 집중호우가 내릴때는 위험한 길이 될것 같았다.
작던 물줄기가 왼쪽, 오른쪽 골짜기에서 모여든 물로 20여분을 내려가면 개울을 건너야할 정도로 큰 물이 된다. 오랜만에 계곡물을 만나 흐르는 땀을 씻어낸다.

개울을 건너면 산행길과 계곡은 멀어지고 나무계단이 시작된다.
나무계단이 끝나면, 오른쪽은 대원사하산길, 왼쪽은 무재치기폭포(0.1km)라는 표지판이 있다. 배낭을 내려놓고 폭포를 찾아 내려가다가 눈앞에 나타난 무재치기폭포의 모습에 입이 벌어진다.
귀찮다고 그냥 지나쳤으면 무재치기 폭포의 모습을 못봤을텐데, 정말 아름다운 폭포였다. 계곡물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많은 양의 물이 50미터의 절벽을 2단, 혹은 3단으로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무재치기 폭포의 시원한 모습


무재치기 폭포를 뒤로하고, 무재치기교를 지나면 세재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세재로 내려가나, 대원사쪽으로 가나 유평에서 다시 만나 대원사로 하산하게 된다. 요즘은 세재길을 많이 이용한다고 들었지만, 정통 대원사계곡 코스를 택한다.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내려가다 계곡을 멀리하고, 거친 오르막길을 오르니 눈앞에 깊은 계곡이 펼쳐져있고, 뒤쪽으로도 지금까지 내려왔던 계곡의 모습이 보인다. 저멀리 무재치기 폭포의 모습도 보인다. 사실 대원사계곡인줄 알았던 이 계곡은 장단골 계곡이다.
여기서 부터는 계곡의 모습은 우거진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고,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반복되는 험하고 지루한 길이 이어진다. 차라리 봄이나 가을에 왔더라면 계곡의 모습도 보고, 단풍이나 신록의 아름다운 모습도 볼 수 있을것 같았다.

장단골 계곡의 산허리길을 끝내고, 20여분 내리막이 계속되는데, 토사유출만을 방지하도록 만들어진 나무계단 때문에 내리막길인데도 엄청나게 힘이 들었다. 앞서가던 사람은 무릎에 압박붕대를 감고 절뚝이면서 내려가고 있었다. 별 도움되지 않는 간단한 인사말만 하고 그를 앞질러 간다. 나무계단하나를 두걸음씩 천천히 내려가다가 옆에 있는 팔뚝굵기의 나무를 잡았는데, 차가운 나뭇가지에서 생명의 기운같은것이 느껴져 깜짝 놀랐다. 이 기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나무계단을 거의 끝낼무렵 딱따구리 소리가 들려온다. 딱따구리는 먹이를 찾거나 다른뜻으로 내는 소리겠지만, 내게는 응원의 소리로 들린다.

조금뒤, 나보다 1.5배는 큰 배낭을 메고, 올라오는 두사람(여성)을 만났다. 저들은 왜 힘든 오르막을 오르는 것일까? 천왕봉을 출발한지 4~5시간동안 내려왔는데, 저들이 오를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도, 힘든 고난의길을 스스로 택하여 오르고 있다. 마치 우리 선배들이 더 나은 내일,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노력했던것 처럼.....
마음속으로 그들을 응원하면서 바로 앞에 있는 개울에 달려가 손을 담그고, 세수를 한다. 오래가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하면 잠시나마 피로가 풀린다.

휴식을 끝내고 내려가는데, 치밭목산장 밑의 모습처럼 작은 물줄기 들이 모이는가 싶더니 금세 커다란 물줄기가 되어 계곡을 만든다.
이곳은 한판골 계곡인데, 유평에서 대원사계곡물에 합쳐지게 된다. 한판골 계곡이 잠시 멀어지는가 싶더니, 눈앞에는 철문이 나타나고, 철문을 나오니 사람사는 집이 나온다. 유평이란 곳이다. 12시 25분, 처음 예상했던대로 천왕봉을 출발한지 5시간 만에 도착했다.

계곡물에 발을 담글려고 하는데, 중봉에서 마주쳤던 중년의 산악회분들이 동동주나 한잔하라고 부른다. 주황색티때문에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시원한 동동주의 유혹에 나는 너무나 쉽게 넘어가 버렸다.
그분들은 산악회에서 버스를 타고 이번에 지리산에 오신 분들인데, 세분 모두 50대의 적지 않은 나이였고, 교수님, 사업하시는 분, 중견기업 임원 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란 없다고 했던가?
동동주를 한잔 마시자마자 곤욕스런(?) 질문이 쏟아졌다.



"지금보니 "민주노동당, 세상을 바꾸자!"? 그래 어떻게 세상을 바꿀것인가?"

"저는 자세한 이념은 모르고, 그냥 세상을 바꾸자는 커다란 뜻에만 동의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냥 얻어 입은 티는 아니지 않는가? 당원이면 ? 이념은 뭐고, 추구하는 세상이 있을것 아닌가?"

"예, 당원은 맞습니다만, 이념은 없구요. 그저 반월공단 노동자로써, 저같은 서민이 잘사는 세상, 보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싶을 따름입니다."



"글쎄,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너무 과격하지 않은가?"

"(하산하면서 생각하던 내용을 응용하여) 다소 관련이 없는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지리산을 종주하면서 수많은 나무와 풀과 경치를 봤지만, 그렇다고 지리산을 안다고는 할 수 없듯이, 저희 민주노동당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가끔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으로만 과격하다고 하는데, 실제 민주노동당은 전혀 과격하지 않고,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일부 과격한 단체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것 아닌가?"

"글쎄요, 노무현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했던 일부 단체가 노무현 정부에 대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하는것은 맞지만, 그런것이 무리한 요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일부 비판적지지자들이 우리당을 버리고, 노무현 정부에 대하여 비판적지지를 했으니, 우리의 요구를 들어달라는것은 어찌보면 정치적 거래인데, 그러한 거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너무 반대만 하고, 부정적이지 않은가?"

"저희가 말하는 평등은 하향화된 평등이 아닌, 빈부격차없는 평등, 업그레이드된 평등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주노동당이야 말로 다른 어떤당보다 긍정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 좋은데, 너무 성급하지 않은가? 그동안 해오던것이 있고, 기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것도 있는데......"

"네, 저도 우리가 만들려는 세상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것은 압니다. 역설적으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질수 없기때문에 지금 이렇게 노력하는겁니다. 산을 내려오면서, 저는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저들에게 힘을 줄까? 어떻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 민주노동당은 이제 막 산을 올라가는 사람들이고, 선생님들(딱히 할말이 생각이 안났음^^)은 산을 내려오시는 분들입니다. 우리 민주노동당이 부족한것이 많으면 많은 충고 부탁드립니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세번째분)

"난 친구들이 사업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데, 대기업노조(?)에서 파업하는거 이해를 못하겠어. 월급도 글쎄 엄청나게 받는 사람들이, 그래가지고 되겠어? 비정규직, 하청업체는 얼마나 열악한데...."

"비정규직의 어려움은 노조책임입니까? 비정규직을 차별하도록 만든, 정권이나 사용주 책임입니까? 당연히, 정권의 책임이고, 사용자 책임입니다. 민주노총이 지금 월급올려달라고 파업하는것 아님니다. 임금삭감, 휴가축소 없는주 5일제 근무, 비정규직차별철폐 아님니까?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인 요구사항을 내거는 파업은 우리나라에서 불법파업이 됩니다. 임금문제를 내걸면 조합주의라고 욕하고, 정치파업하면 불법파업됩니다."



"그래도, 2만불 시대 열려면 노사가 서로 협력해야지..철도파업은 또 어떻고......민주노총 한국노총 경쟁하고, 전교조 한교조 교총 경쟁하고....?"

"철도파업에 대한것은 시간도 없고, 저도 이제 하산해야 하니 다음에 또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철도파업으로 8000여명이 징계를 받고, NEIS 반대로 8000여명이 징계를 받는데 273명 국회의원중 한사람이라도 노동자편에 서서 그 문제를 거론한 의원 있습니까? 서로 생각이 다를수는 있지만, 어떻게 273명 국회의원중 한사람도 노동자편에 서서 문제제기를 하고, 토론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년 총선에서는 노동자, 서민을 대표하여 우리 민주노동당이 반드시 원내에 진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누가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한단 말입니까?"



"그럼, 기존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잘하는것은 업는가? 칭찬한번 해보게."

"칭찬할것은 솔직히 없구요. 저는 한나라당이 없어져야 할 당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내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영향력이 줄어든만큼, 우리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정치세력의 역할이 줄어들수는 있지만,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것은 전체주의적인 생각이고, 민주당은 사실 서민을 대표한다고 서민표는 가져가고 실제로는 재벌들에게서 돈받고, 그들을 대표하기 때문에 어찌보면 한나라당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 당장 개인적인 바램은 무엇인가?"

"솔직히, 저 개인적인 바램은 지금 일하는 직장을 조금 더 나은 작업환경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주당 근로시간도 줄이구요.."



산악회분들은 얘기가 끝날 무렵, 저런 젊은이가 있으니 우리나라의 미래는 밟다. 혼자 산행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는것이 대단하네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몸둘바를 모르겠다.

시간을 보니 무려 40여분 이나 뜨겁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산악회 분들이 서울 올라갈꺼면 버스타고 같이 가자고 해서 일단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분들과 함께, 한판골계곡 깊은곳에 들어가 차가운 물에 들어가 비누는 쓰지않고 목욕을 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얼어붙는다.(걸리면 과태료 50만원 인줄 나중에 알았다.--;;)

간단히 목욕을 하고 대원사까지 걸어내려갔다. 유평에서 대원사까지는 약 15분이 걸린다. 대원사에 들렀다가 매표소까지 또 걸어내려가야 하는데, 넓은 대원사 계곡을 바라보며 걷기 때문에 30분정도 거리지만, 지루하지가 않다. 대원사계곡은 6월초 찾았던 설악산의 백담사계곡 같은 느낌이다.



대원사, 지리산 동부의 대표적인 절로, 150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백담사 계곡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45분, 그렇게 놀면서 왔는데도 산악회 분들은 5명밖에 내려오지 않았다. 출발할려면 6시는 되어야 한단다.
고민끝에 오후 3시 30분, 진주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몸을 맡겼다. 다행히 진주 버스터미널에서 한장남은 5시 우등고속을 타니 서울남부터미널에 8시 45분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가야하는곳은 푸른 자연이 아니라, 답답한 일상의 공간이다.
내자신이 한없이 작아 질 수 밖에 없었던 지리산...언제 다시 이번과 같은 산행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