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9. 12. 18:06ㆍ산행일기
여름산행, 그 힘들었던 이야기 (시민언론, 오마이뉴스 기고 글)
▲ 무룡산에서 바라본 덕유산
뒤쪽 멀리 보이는 산이 향적봉 ⓒ2001 엄준용
"기사양반, 나 전화 좀 하고 올께. 잠깐만 기다려."
"집에 가면 영감 볼텐데 전화는 무슨? 돈은 있어?"
"어, 있다."
"없으면 이거 가지고 전화해요."
기사 아저씨와 아주머니 사이에 오가는 정겨운 대화를 들으며, 우리는 서상(함안군)에서 산행입구인 영각사로 향했습니다.
덕유산 산행길은 시원스런 나무 숲으로 시작됩니다. 산행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서, 나머지 일행을 먼저 보내고, 뒤늦게 출발한 회원을 기다립니다. 30여분을 기다리니 생각보다 빨리 그 회원 도착합니다.
먼저 올라간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영각재 못미처 저멀리 산행을 하는 일행이 보입니다. 그들과 합류하여, 영각재에 오르니 비로소 시원스레 뻗어나가는 계곡과, 덕유산의 웅장한 능선이 한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이렇게 능선에 오르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을까요? 눈앞은 힘든 오르막길, 나무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는 힘든 계곡 산행을 끝내고, 일정한 높이의 능선에 도달하면 비교적 편안한 길을 갈 수 있거든요. 평지만 걷는 사람들은 이 능선 길에 오르는 즐거움을 알 수가 없을 거예요. 때로는, 편안한 능선길을 걷어차고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는 사람도 있겠죠.(그렇지만, 사실 덕유산 종주 길의 능선은 쉽지 않았습니다)
영각재에서 남덕유산까지는 철계단을 통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습니다. 철계단의 숫자는 많지만, 주위의 경관에 힘든 줄을 몰랐나 봅니다. 남덕유산 정상(1507m)에서는 여러 가지 함성을 질러 답답한 마음을 풀어줍니다. 저 많은 잠자리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정상에서 등산로를 따라 쉽게 내려간 월성재에서 삿갓봉을 바라보니 남덕유산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게 무지 높아 보입니다. 가야할 길은 아직 멀기만한데, 해는 벌써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반복, 삿갓봉 정상인가 했더니 또 오르막이고, 안개도 빠른 속도로 짙어집니다.
목이 점점 말라오고, 남덕유산 정상에서 다 마셔버린 물이 그립습니다. 날도 어두워져서 등산로도 희미해집니다. 두려움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할 때, 툴툴툴툴, 엔진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옵니다. '이 얼마나 반가운 문명의 소리인가?' 결국 우리는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피소에 도착했다는 안도감보다는 뒤처진 일행의 걱정이 앞섭니다. '얼마나 목이 마를까? 길을 잃으면 어떡하나? 다치면 어떡하나?' 짐을 내려놓고 대신 물통을 등에 지고, 랜턴을 들고 이미 어두워진 삿갓봉길을 다시 돌아갑니다. 한참을 가서야 어둠 속에서 뒤처진 일행을 만나 물을 건네고, 안전을 확인합니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는 모습들, 그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니 머리 끝이 삐쭉거립니다. 어두워진 깊은 산골에서 우리는 그렇게 반가운 재회를 했습니다.
산행은 언제나 철저한 준비가 요구되지만, 이런 예상치 못한 작은(?)사고가 있기에 재미가 있고, 같이 산행을 하는 일행들은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삿갓골재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둘째날 산행을 시작합니다. 대피소 바로 옆에 솟아 있는 어제의 그 삿갓봉을 바라보니 씨익 웃음이 나옵니다. '산악 게릴라가 따로 없었지.'
무룡산(1491m)을 오르는 길 주위에는 노란 원추리꽃이 한창 피어 있습니다. 일행은 아침이라서 그런지 어제와는 다르게 힘을 내어 무룡산을 오릅니다. 무룡산 정상에 오르니 향적봉까지 꿈틀거리며 이어지는 긴 능선길이 보입니다. '저 길을 오늘 가야 되는구나.'
무룡산에서 동엽령까지 등산로는 어제의 험한 삿갓봉 길에 비하면 편안하고 다정합니다. 시원한 숲속 길과, 사람 키 높이의 싸리나무 길, 이름 모를 나무와 풀들로 만들어진 길이 이어집니다. 산악지도에 나온 동엽령의 위치와 실제 동엽령의 위치에 혼란을 느끼며, 동엽령에 어렵게 도착합니다. 지도에 표시된 샘을 찾아 봤지만,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잠시 고민하며 서 있는데 늦게 도착한 일행이 제가 만든 작은 그늘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이것도 그늘이라고 앉은 것일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물어보고 올 걸.'
'물을 아꼈어야 하는 건데...'
이미 빈 통이 되어버린 물통을 보니 후회가 막심합니다.
일단 조금 남은 물을 믿고, 다음 목적지인 중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직도 한 시간여를 더 가야 한다는 등산객의 말이 절망으로 다가옵니다. 이번이 첫 산행인 사람은 더 힘들어하고, 발가락이 벗겨지는 사람, 발목이나 무릎을 삐끗한 사람도 생깁니다. 우리는, 남은 물을 나누어 목을 적시고 서로를 도와가며 산행을 계속합니다.
이 거대한 산의 한가운데서 세속의 욕심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뱃속을 온통 물로 채우고 싶은 욕망,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을 피하고 싶은 욕망, 앉아서 쉬고 싶은 욕망, 모두 기본적인 욕구뿐입니다. 나보다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보니, 내 남은 힘을 저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는 조금 고차원적인 욕망이 생깁니다. 너무 힘들어하는 일행의 가방을 빼앗아 들고, 10분여를 앞서 갑니다.
중봉인가 하고 올랐던 송계삼거리에서의 휴식을 뒤로 하고, 마침내 제일 힘들다는 중봉(1594m)에 오릅니다. 두 팔을 벌려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습니다. 차갑기까지 한 덕유산의 안개바람이 금세 땀을 식혀줍니다. 에어컨 바람보다 시원하다는 말이 불쑥 튀어나옵니다. 이렇게 맑고 깨끗한 산바람 앞에서 에어컨을 생각해 낸다는 게 우습기는 했지만, 에어컨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바람은 시원합니다. 바람주머니를 만들어 사무실에 가져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제 향적봉이 눈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중봉에서 향적봉 가는 길은 주목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 하지만 그 시간도 이 산의 세월에 비하면 보잘것 없이 짧은 시간인데, 그럼 이 주목 앞을 스쳐 지나가는 오늘 우리의 시간은..... 무수한 시간 앞에서, 거대한 산 앞에서 저는 한없이 작아집니다.
▲ 중봉에서 바라본 덕유산
제일 뒤쪽 왼편이 남덕유산, 희미한 삿갓봉, 그 앞쪽 왼편의 삼각형 무룡산, 동엽령등이 이어진다. ⓒ2001 엄준용
향적봉은 잠시 뒤로 미루고, 정상 바로 아래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6시간 30분 동안의 힘든 산행의 기억은 우리 모임의 목적(?) 한솥비빔밥 한숟가락에 모두 잊혀집니다.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1614m)에 오르니,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왔던 남덕유산에서 이어지는 능선이 보입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벅찬 감정이 솟아 오릅니다.
'저기서부터 우리가 걸어 왔단 말인가?'
또한, 날씨가 맑아서 멀리 지리산 천왕봉, 광주의 무등산까지 보입니다. 동쪽으로는 가야산, 서쪽으로는 운장산이 보이고, 계룡산과 대둔산은 보이는듯 하지만 어느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체사진으로 짧은 시간을 영원으로 만들고, 하산을 시작합니다. 아프거나, 사정이 있는 몇몇은 어쩔 수 없이 곤돌라라고 불리는 케이블카 비슷한 것을 타고 하산을 했는데, 끝까지 함께 산행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고, 씁쓰름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덕유산자락 어딘가에 있을 스키장과, 양수발전소는 정말 필요한 존재인가요?' '곤돌라는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시설, 관광객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명물인가요?'
산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백련사로 내려온 우리는 무주구천동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를 감상합니다. 구천동 33경을 살피기에 일행은 너무 지쳐 있습니다. 깊은골에 있는 민박집에서 여정을 풀고, 둘째날 산행을 마무리 짓습니다.
다음날 저녁, 영등포역 대합실의 시끄러운 안내방송이 귀를 울립니다. 바쁘게 제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을 보니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벗어나고 싶어도 결국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삶. 세상과의 소통이 없었던 짧은 산행. 아니 어쩌면 속세의 뉴스와 단절되었을 뿐이지, 더 큰 세상인 자연과는 소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요. 조금 늦게 가더라도, 우리 주위 사람들과 서로 소통하며 살면 안될까요?
산행지: 덕유산
산행날짜: 2001년 7월 28~29일
날씨: 맑음
산행코스: 서상면 - 남덕유산 - 대피소 - 동엽령 - 향적봉 - 구천동계곡
산행시간: (1박 2일) 총 13시간
일행: 더불어한길 __명
교통: 서상터미널(버스), 무주터미널(버스)
'산행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행은 배움이다. 계룡산 산행기(2001년 9월 16일) (0) | 2001.11.04 |
---|---|
가까운 수리산에서 더 가까워진 사람들(2001년 8월 19일) (0) | 2001.10.28 |
다시 더불어한길, 삼성산 산행기(2001년 6월17일) (0) | 2001.08.27 |
관악산 인덕원-사당 종주기(2001년6월6일) (0) | 2001.08.22 |
산행 초보의 청계산 개척 산행기(2001. 5.13) (0) | 2001.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