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2. 13. 21:18ㆍ산행일기
회사를 옮기고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 새로운 일에 적응하려면 멀었다. 7년 동안 기계를 설계하다가 새롭게 풍력발전 일을 선택한 것은 산 정상을 눈앞에 두고 새로운 봉우리를 찾아 떠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이직을 하고 매일같이 늦은 퇴근에 야근이 이어지는 나날이었지만, 금요일 저녁에 칼퇴근을 하고 동서울로 향한다. 동서울에서 이번에 겨울산행을 함께 할 봄날, 개똥이, 귀니, 산바람을 만난다. 산행 준비물을 다시 확인하고 부족한 것은 메꾸고,근처 찜질방으로 간다.
아침 6시가 되기 전에 찜질방을 나와 동서울 버스터미널에서 속초 가는 첫차를 탄다. 버스 승객 대부분은 산행객들이라 산악회 버스 같다. 아직 깊이 잠들어 있는 서울을 뒤로하고 버스는 어둠속으로 줄행랑을 친다.
한참 잠들었다가 일어나 보니 홍천 화양강 휴게소에서 버스가 쉬고 있다. 홍천을 지나 인제를 지나면서 눈이 내린 흰 산이 보여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지만, 소양강 상류는 지난여름 대홍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한계령 구간을 지나며 보니 홍수에 쓸려 나간 계곡, 아직 엄청나게 쌓여있는 나무 더미들, 부서진 집들에 가슴이 살짝 아파왔다.
한계령에 대부분의 승객들을 내려 준 버스는 구불구불한 고개를 조심스레 내려가 오색에 우리를 내려 준다. 버스에서 내리자 찬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상가까지 얼른 걸어가 북어해장국으로 뒤늦은 아침을 먹는데, 식당 주인께서 밖이 춥다고 이것저것 챙겨 주신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 그런지 몰라도, 강원도 사람들은 인심이 좋다. 식당에서 뜨거운 물을 얻어 보온병에 채우고, 드디어 겨울 설악 대청봉을 향해 출발한다.
#2007년 1월 27일
(10:40) 입장료를 받지 않는 매표소를 지나 곧바로 계단이 시작되고 된비알이 한참 동안 계속된다. 조금 밖에 오르지 않았는데, 아직 몸이 덜 풀린 귀니와 산바람이 쉬었다 가자고 조른다. 산행 초반에 너무 무리해도 다치기 쉽지만, 많이 쉬어도 몸이 늦게 풀린다. 개똥이가 두 처자를 잘 이끌고 몸이 풀릴 때까지 쭉 치고 오른다. 결과만 보면 누구든 해야 하는 일이지만, 악역을 맡기가 쉽지는 않다. 돌 비탈이 끝나고 경사가 완만해졌지만, 눈이 없어 아직 겨울산행 분위기가 나지는 않는다.
(12:50) 눈이 조금씩 보이더니 능선 중턱 정도 오르니 눈과 얼음으로 미끄러운 길이 시작된다. 설악폭포를 지나고부터는 눈 쌓인 길이 이어진다. 조금씩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이 더 많이 쌓여있다. 능선을 한번 더 치고 올라가 바람이 불지 않는 곳을 찾아 점심을 먹는다. 아침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금방 배가 고파온다.
점심 먹기 전에 최대한 많이 올라와서 점심먹고 오르는 길은 그리 힘들지 않다. 눈이 많아서 겨울산행의 기분이 나고, 나뭇가지만 있는 겨울 산행이라 고도가 높아질수록 조망이 시원하다. 여름에 오색으로 대청봉을 오르면 숲이 우거져 대청봉 근처까지 조망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15:15) 계속되는 오르막길에 힘이 부치지만 멀리 중청과 중청대피소가 보이고, 대청봉 아래쪽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넉넉 잡아도 한 시간 안에는 대청봉에 도착할 것 같다. 힘이 빠질 때가 되었지만, 번번이 설악산에 오르지 못했던 산바람도, 운동부족을 호소하던 귀니도 아직은 생생하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과 어우러진 주목나무 군락이 우리에게 힘이 되어준다.
(16:10) 드디어 설악산 대청봉에 도착이다. 점심시간 포함 오색에서 5시간 30분이 걸렸으니 많이 늦은것은 아니다. 대청봉에 오르니 내설악과 외설악이 모두 눈에 들어온다. 화채능선과 천불동 계곡, 공룡능선과 용아장성까지 막힘이 없다. 서북능선으로 눈을 돌리니 귀때기청봉이 눈에 들어오고, 서북능선 서쪽 끝으로 안산이 조그만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한계령 너머 남서쪽으로 가리봉, 거대한 주걱봉의 모습에서는 아름다움, 위대함, 위협적인 기운까지 느껴진다. 점봉산은 설악의 남쪽에서 듬직하게 서있다.
대청봉에 도착해서 '산바람'이 가장 즐거워한다. 그동안 설악산 산행 때 다른 일이 있다거나, 중간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 포기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설악산 대청봉에 오르니 꽤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찬 바람이 강하게 불어 손이 애려왔지만, 대청봉에서 바로 내려서기 싫은 마음이 들어 30분 정도 머물며 수다를 떨다가 중청대피소로 내려간다.
(17:00) 중청대피소에 도착해서 자리를 배정받고 저녁을 먹으며 간단히 산행주를 돌려 마시니 피로가 풀리고, 지금 우리의 인생이 아름다워 보인다. 이런 산행에서 친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며 우정을 나누고 싶지만, 내일 산행을 위해 이른 시간 잠자리에 든다.
#2007년 1월 28일
(09:10) 일출을 보려고 일찍 일어나 보니 안개가 너무 자욱하다. 일출은 포기하고, 중청대피소를 떠난다. 바람이 차갑고 대피소 근처의 날씨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여벌의 보온 옷, 마스크와며 장갑, 모자 등으로 온몸을 단단히 무장한다. 추위에 떠느니 약간 더운 게 나을 것 같았다. 대피소를 출발하여 100미터도 가지 않았는데, 안개가 걷히고 겨울산행의 백미 새하얀 설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귀니, 산바람, 봄날과 개똥이도 사진 찍는데 여념이 없다. 물론, 나도 사진 찍기에 서둘러 동참한다.
환상적인 설경은 중청을 지나 끝청까지 계속 이어진다. 특히 끝청에 못 미쳐 내설악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에 오르니 수채화 보다 더 아름다운 설악산의 설경이 펼쳐진다. 새하얀 눈과 공룡능선의 조화, 아침에 살짝 내린 눈과 안개가 만든 상고대가 어울려 예쁜 설악을 더욱 예쁘게 만들고 있다. 처음 설악에 온 산바람과 가끔 산행에 참가했던 귀니도 지금껏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다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즐거워한다. 설경도 아름답고, 설악산도 아름답고, 함께 산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아름답다.
끝청을 지나 한계령까지 이어지는 서북능선은 주변 풍광이 너무 아름답다 보니, 힘들거나 지루해할 틈이 없다. 풍광에 취해 한참 걷다 보니 귀때기청봉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2005년 한계령에서 귀때기청봉을 지나 장수대까지 산행했던 기억이 있어, 귀때기청봉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관계상 오늘은 갈 수 없는 곳이다.
(13:00) 서북능선 한계령 갈림길에 도착해 '설악산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먹는다. 산행의 아쉬운 마음은 서북능선에 묶어두고, 산행에 지친 몸은 한계령으로 내려선다. 한계령길로 두 번 올라온 적은 있지만 내려가는 것은 처음이다. 한계령 코스 중간 전망대에 올라 귀때기청봉과 서북능선을 보니, 예전에 오를 때 봤던 기억이 난다. 전망대를 지나고부터 계속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조금씩 휘날리던 눈이 점점 많이 내리기 시작한다.
(15:00) 계속 눈이 내렸지만, 모두 안전하게 한계령 휴게소에 도착한다. 아무 사고 없이 건강하게 도착해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설악을 뒤로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교차한다. 하지만, 산행의 흔적은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을것이고, 우리는 다시 그 기억의 흔적을 찾아 설악산을 찾아올 것이다.
눈이 더 쌓이기 전에 한계령에서 버스를 타고, 원통, 홍천을 거쳐 서울로 돌아온다. 모두들 그냥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는지, 1박 2일 산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긴 뒤풀이를 끝내고 뒤늦게 집으로 돌아간다.
산행지 : 설악산 대청봉 (강원 양양, 인제 1708m)
날 짜 : 2007년 1월 27~28일
날 씨 : 맑음, 구름 조금, 눈 조금
산행코스 : 오색- 설악폭포- 대청봉- 중청대피소- 서북능선- 한계령 갈림길- 한계령
산행시간 : 총 12시간 10분 - 6시간 20분(10:40~17:00, 휴식 포함) / 5시간 50분(09:10~15:00)
동행 : 봄날, 개똥이, 귀니, 산바람, 맑은물 (5명)
교통 : 동서울-오색(시외버스), 한계령-원통 / 원통-홍천 / 홍천-동서울 (시외버스)
[설악산 포토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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