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29. 00:00ㆍ북한산특집
6월 가뭄, 7월 장마가 올해도 반복되고 있다. 주중에 계속 장맛비가 내렸고 금요일엔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토요일에 산에 갈 수 있게 되었는데, 마침 지루하던 장맛비도 그쳤다. 멋진 계곡을 기대하며 집 앞에서 탄 버스가 북한산 청수계곡 근처에 이르자 엄청난 물이 넘실대며 흐르는 정릉천이 보인다. 종점에서 내려, 정릉 탐방지원센터를 지나니 등산로 옆으로 거센 물이 흘러 내려간다. 오늘 정릉계곡은 살아있는 거대한 생물 같기도 하고, 굉장한 생동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평소에는 이름만 폭포인 청수 폭포도 오늘만은 유명 폭포에 뒤지지 않는 멋진 폭포로 변신해 있다. 기대하지 않았던 정릉 청수계곡 곳곳이 폭포가 되고, 거친 계류가 되어 흐르고 있다. 북한산 청수계곡은 높은 산의 깊은 계곡 부럽지 않은 멋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멋진 풍광을 감상하며 심심할 겨를 없이 올랐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가족 탐방객들이 많다. '가족과 함께 올걸 그랬나?' 집에 있는 가족이 생각난다.
멋있는 청수계곡과 북한산 숲에 푹 빠져 걷다가, 문득 버스에서 들었던 충북지역 폭우 뉴스가 떠오른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가뭄으로 물이 부족해서 문제였는데, 장마철에는 물이 넘쳐서 문제가 생긴다. 물 이든, 물질 이든 과유불급이다. 물이 너무 많으면 홍수가 되듯, 물질이 너무 많아도 환경문제, 쓰레기 홍수, 온실가스 홍수가 된다.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현대인 가운데 하나인 나는 어떤가? 과연 적당한 절충점에서 더 많은 물질 소유를 멈출 수 있을까?
생각을 이어가며 계곡을 따라 오르는데, 계곡 물이 줄어들고, 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숨이 점점 차 온다. 온 힘을 다해 산을 오르면 어려움을 이겨낸 것 같아 뿌듯함이 있었는데, 오늘은 힘듦도 산을 오르며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의 하나로 다가온다. 가파른 길 앞에서 의지를 불태웠던 건, 의식적인 의지가 필요했다는 뜻이고, 아직 단단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 단단하지 못했던 나도, 시대에 맞게 생각과 삶의 태도가 변하는 나도,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고여있지 말고 계곡 물처럼 힘차게 흘러가보자.
보국문 오르는 가파른 등산로는 빗물에 많이 파였어도, 나무들이 총총 있는 북한산 숲은 큰 비를 머금고도 멀쩡하다. 숲의 댐 기능을 새삼 떠올린다. 아스팔트, 콘크리트 도시에 내린 비는 토목, 건축, 기계, 도시공학 고급 엔지니어링을 기반으로 훌륭하게 설계된 배수로를 따라 빠르게 배출된다. 그런데, 훌륭하게 수행해온 엔지니어링은 기후변화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근본적으로 기후변화를 막기보다는 급작스런 집중호우에 대해 단순히 배관 직경 늘리는 토목공사에 고도의 엔지니어링이 동원되지만 첨단 대도시는 늘 빗물처리에 고심이다.
숲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댐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아무런 엔지니어링 배경, 지식이 투입되지 않았지만, 숲은 많은 물을 머금고 있다가 정교하게 시차를 두고 흘려보낸다. 전직 엔지니어였던 나는 이제 인류의 엔지니어링이 자연적인 숲 보다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혼자 걷다 보니 온갖 잡생각들이 쉴 새 없이 나를 따라다닌다. 숲과 산을 아직도 평하고 싶고, 인간사회도 평하고 싶다. 나를 기준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이겠지.
오늘 오르는 길은 8년 전 가을, 아내와 함께 올랐던 등산코스였다. 그때 설레고 좋았던 기억으로 힘을 내어 오르니, 졸졸 이어지던 계곡물이 완전히 없어지고, 드디어 보국문에 도착한다. 보국문에서 북한산성을 따라 보현봉 방향으로 가는데 검은 먹구름에 쌓인 보현봉이 보인다. '계속 가야 하나?' 일단 성덕봉 전망대까지만 올라 주위를 둘러보며 어디로 갈지 생각해 본다. 괜히 무모한 산행을 하다가, 벼락이라도 맞을까 봐 4.19 기념탑 방향으로 산행계획을 바꾼다. 이제 가족이 있는 만큼 무모한 산행은 멀리해야 한다. 보국문과 대성문 사이 성덕봉 전망대에 앉아 한참 청수계곡, 보현봉, 백운대를 바라보며 아름다움에 빠져 본다. 높은 봉우리에 올라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어 진다.
올라왔던 방향으로 되돌아 보국문을 지나 대동문으로 향한다. 장마철이라 북한산성을 지나는 등산객보다 까치수영(꽃)이 더 많고, 간간히 빨갛게 익은 산딸기 덩굴도 보인다.
대동문을 빠져나와 4.19 국립묘지 방향(아카데미하우스 호텔)으로 내려간다. 산들바람에 살랑이며 흔들리는 산수국 군락을 만난다. 북한산성에서 구천계곡으로는 급격히 내려가는데, 이쪽도 비 덕분에 꽤 높은 곳에서부터 계곡이 시작된다. 곳곳에 흐르는 맑고 시원한 물이 만들어 내는 계곡의 장관은 눈과 귀를 호강시키는 장마철 산행의 묘미다. 청수계곡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붙이고 싶을 정도로 제법 모습을 갖춘 폭포들이 여기저기 만들어져 있다.
등산로는 잠시 계곡과 멀어지고, 바윗길을 지나 가파른 길로 들어더니, 계곡 아래에서 물소리가 시끄럽다. 표지판을 따라 계곡에 내려섰더니 구천폭포가 눈앞에 나타난다. 구천폭포는 전체가 3단 내지 4단 폭포로 보이는 큰 폭포다. 구천폭포 전체를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오늘처럼 물이 많은 날에는 15미터 정도 되는 가장 아래쪽 폭포만 보아도 충분하다. (*1단 폭포 위쪽은 출입 금지)
폭포 아래에는 여러 사람들이 앉아 쉬고 있다. 나도 폭포 아래 계곡에 들어가서 잠시 여유를 갖고 자연을 느껴본다. 이렇게 수량이 충분한 여름 날에는 안전을 확보하는 범위 내에서, 더 많이 국립공원 계곡을 개방하는 것이 오히려 사람과 자연의 거리를 줄이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구천폭포를 뒤로하고, 개조 공사 예정인 아카데미하우스 호텔옆 계곡을 지나 북한산 산행은 끝낸다.
집으로 돌아갈려면 버스를 환승해야 돼서, 둘레길을 따라 화계사 입구에서 버스를 타기로 한다. 그런데, 이 계획은 지나친 과욕이었다. 냉골 공원 입구까지는 조용한 둘레길을 따라 걷기 좋았지만, 냉골 공원에서 화계사 입구까지는 '사유재산' 구간으로 인해, 원래 완만했던 둘레길이 꽤 높은 구간으로 변경되어 있다. 언덕길인줄 알고 따라갔던 산행길을 다시 올라야 해서 힘이 들기도 했지만, 둘레길이 힘들게 변경된 이유가 대기업 건설사의 욕심 때문이라는 사실이 정신적인 피로감으로 다가왔다. 사유재산은 인정해야 하지만, 이렇게 우거진 북한산 숲이 어느 순간 등기 서류상에 일개 대기업 건설사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시민들의 편익과 자연보다는 그곳에 아파트를 지어 집장사를 하려는 건설사를 사유재산 인정이라는 핑계로 규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참 피곤했다.
피곤한 생각은 화계사에 몰래 내려놓는다. 불합리함을 느꼈지만, 세상사 모두 관여하다가는 이 더운 여름에 녹아 버릴 것만 같다.
오늘 산행의 진정한 종점, 화계사를 지나 화계사 사거리 근처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집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버스 뒷자리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로 '아빠'를 부른다. 나들이 나왔다가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탄 딸과 아내를 버스에서 만나 행복한 집으로 돌아온다.
산 행 지 : 북한산 청수계곡-산성주능선-구천계곡(서울 성북구, 강북구)
산행날짜 : 2017년 7월 16일
날 씨 : 구름
산행 시간 : 4시간 (14:45~18:45)
산행 코스 : 정릉탐방지원센터 - 청수계곡 - 보국문 - 대동문 - 구천폭포 - 아카데미하우스 호텔 - 냉골 - 화계사
일 행 : 단독
교 통 : 서울 시내버스 이용
[포토 산행기]
'북한산특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한산 형제봉 분홍산 산행 (2018.4.14) (0) | 2018.04.22 |
---|---|
영하 20도 대한(大寒) 추위에 오른 북한산 (2018.1.25 ) (0) | 2018.01.31 |
북한산 국민대-형제봉-성북동 산책 산행 (2016.5.8) (0) | 2016.05.29 |
상쾌함으로 마음이 채워진 사패산 (2015.9.13) (0) | 2015.09.30 |
딸 인생의 첫 산행, 북한산 둘레길 5구간 명상의 길(2014.6.8) (0) | 2014.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