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 30. 14:20ㆍ전국산행일기
정상에 오른 등산객이 하산하듯, 무덥던 기온이 내리막 길을 걷는 9월이 되었다. 후배와 어느 계절에 가도 좋은 운악산 산행을 하기로 했다.
집에서 조금 늦게 나와, 시간을 만회해 보려고 운악산 가는 1330 버스 대신 춘천행 ITX를 탔다. 승차감도 좋고, 서울을 벗어나니 창밖 풍경도 좋다. 그런데, 안내방송부터 정차역에 청평역이 빠져있어 불안했는데, 역시나 청평역에서 멈추지 않고 가평역에서만 멈춘다. 빨리 가려던 계획이 틀어졌고, 이를 만회하려던 잔머리는 오히려 독이 됐다.
가평역에 내려, 서둘러 청평역 방향 전철로 갈아타고 되돌아가다가 늦은 시간을 만회하려고 청평역 도착 전 상천역에서 내린다. 상천역에서 버스를 타고 청평검문소 삼거리에서 환승하여, 복잡한 청평 시내에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을 줄여볼 계획이다. 하지만, 상천역에서 청평 방향 버스는 30분을 더 기다려서야 도착한다. 청평검문소 삼거리에 내려 또다시 20여분을 기다려 1330-44번 버스를 탄다. 대도시의 교통이 얼마나 편리한지, 농촌지역의 대중교통이 얼마나 불편한지 깨닫는다.
운악산 아래 주차장에 도착하니 12시 30분이다. 집에서 9시 30분쯤 출발했으니 3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웬만한 강원도 산에 가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많이 다녀본 산이라고 제대로 교통편을 찾아보지 않고 우왕좌왕하다가 더 늦어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운악산을 가려면 청량리역이나 상봉역에서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는 1330-44번을 타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운악산 주차장에서 1시간 넘게 기다린 후배는 이미 산에 다녀온듯한 표정이다. 빨리 좀 다니라는 핀잔을 듣고, 편의점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오후 1시가 넘어 산행을 시작한다. 운악산은 산행이든, 여행이든 가끔 찾곤 하는데, 운악산 아래 식당가는 10여 년 동안 큰 변화가 없다. 대신, 주차장 너머로 빼곡히 들어선 펜션이 보인다.
식당가를 지나 운악산 일주문을 지나니 산행을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오늘은 눈썹바위로 올라 병풍바위, 만경대, 정상, 절고개, 현등사를 거쳐 다시 일주문으로 내려올 예정이다. 일주문을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갈림길을 선택하여, 나무 계단길과 잡목 숲길을 지나 눈썹바위까지 단숨에 오른다. 오전에 잘못 판단하여 이리저리 헤매느라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몸을 움직이며 걸으니 기분이 회복된다.
이름대로 눈썹을 닮은 눈썹바위를 지나면 가파른 숲길이 이어진다. 눈썹바위 코스는 바윗길로만 이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숲길이 나오니 조금 낯설다. 잠깐의 가파른 숲길을 지나면, 이제는 운악산 산행의 묘미, 바윗길이 시작된다. 운악산 바윗길은 등산화만 신으면 오를 수 있어 크게 위험하지는 않고, 사방으로 조망이 트여있어 좋다.
이름 모를 작은 봉우리를 넘으면 병풍바위가 눈앞에 펼쳐진다. 병풍속에서나 만날 법한 작은 바위 봉우리들이 모여서 산 모양의 큰 바위 봉우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운악산을 찾을 때마다 보아도 또 보고 싶은 절경이다. 병풍바위를 바라보며 바윗길을 오르면, 운악산을 대표하는 미륵바위를 만난다. 연인산 능선을 배경으로 바윗길 중간에 우뚝 솟은 미륵바위,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멋있는 바위다. 미륵바위에서 만경대까지 이어지는 바윗길은 가팔라서 철계단이 많고, 매우 힘들다. 다리만 힘든 게 아니라 숨도 차오고 오를수록 기운은 떨어진다. 풍광은 좋은데 평소 운동부족과 생활습관, 체력저하를 동시에 느낀다.
운악산 정상 옆의 암봉, 만경대에 오르니 바람이 시원하다. 하지만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 때문에 시야는 시원하지 못하다. 주변의 모든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만경대지만, 오늘만큼은 연인산, 매봉 능선, 명지산, 귀목봉, 축령산... 어느 것 하나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만경대를 지나 바로 도착하는 정상은 예상과 달리 한산하다. 산행 인기가 줄었기 때문일까? 계절의 영향일까? 미세먼지의 영향일까? 몇 년 전 가을에 등산객들로 북적이던 운악산이 아니다. 937미터 정상(동봉)에서 서봉까지 갈려다가, 그냥 절고개 방향으로 하산한다. 정상에서 절고개 방향 100미터 내려간 지점엔 야영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단순 등산에서 캠핑으로 산행 문화의 변화가 생겼다지만, 누가 힘든 야영 짐을 지고 운악산 정상까지 올라올까? 생각했는데, 내려오다가 야영 배낭을 지고 올라가는 팀을 만나긴 했다. 한북정맥 종주 시에도 이용하면 요긴하게 사용될 거 같긴 하다.
운악산에는 멋진 바위들이 많은데, 절고개 위쪽 남근바위도 그중에 하나이다. 다소 투박하게(?) 생기긴 했어도, 오묘하게 닮은 건 사실이다. 남근바위 안내판에 소개된 과거의 이혼, 아들 선호 문화는 싫든 좋든 우리 역사였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역사의 뒷길로 사라졌다.
절고개로 내력 가다 보니 서쪽의 포천 대원사 내려가는 갈림길을 만난다. 10여 년 전 운악산 첫 산행 때 대원사로 내려갔던 길인데, 그 길의 흔적을 다시 만나니 그때 산행 기억도 떠오른다. 젊고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지만, 사람들과 신나게 떠들고 즐겁게 산행하던 그 시절.
절고개에서부터 현등사로 내려가는 길은 매우 급하다. 현등사 앞을 가로막은 남서쪽 능선과 우거진 참나무 숲에 햇빛이 가려져 대낮인데도 등산로가 어둡기까지 하다. 물이 거의 없어 아마도 '비 오면 폭포'인듯한 폭포를 지나니, 이전 산행에서는 못 봤던 코끼리바위가 보인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코끼리와 꽤 비슷한 형상을 가진 바위다. 산을 오를 때와 내려갈 때 보는 풍광이 다르다고 하지만, 같은 코스를 몇 번째 내려가는데도 처음 눈에 들어오는 풍광들이 있다.
마른 계곡을 지나 계곡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지점에 오래된 사찰 현등사가 나온다.
현등사는 예나 지금이나 공사 중이다. 10년 넘게 공사 중이다. 깊은 산속의 조용한 사찰이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욕구가 느껴진다. 고요함과 자연의 소리, 과거에서 이어오는 시간의 흐름, 깊은 산속 사찰에 들어서면 부처님을 모르더라도 부처님의 뜻을 느끼고, 그 기운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속세에서 살아가는 보통사람이 사찰의 확장 욕구를 알기는 쉽지 않다. 지난 몇 번의 산행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현등사 앞에서 운악산 여러 계곡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합쳐지는걸 오늘 알게 됐다. 이 또한 이곳에 현등사를 세운 이유가 있으리라. 운악산에 올 때마다 새롭게 알아 차린 게 여러 가지다.
현등사 아래 유명한 민영환 암각서를 지난다. 암각서를 보고 지났지만, 그 글자는 비장한 무엇이 아니라 '민영환'이라고만 적혀있다는 걸 알았다. 구한말 정부 고위 관료의 고심은 이해되나, 어떤 마음에서 자신의 이름만 새겨놓은 건지 이해하긴 쉽지 않다. 현등사 아래 계곡이 시원하고 아름다운 건 알고 있었지만, 무우 폭포와 백년폭포의 위치를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여러 산과 명소를 다니며, 누군가 규정한 설명보다, 그것에서 느껴지는 그 순간의 느낌을 따르긴 했지만, 오늘은 '이 순간 처음으로 알고, 느껴지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다. 지식은 지식대로 훌륭하지만, 오늘 느껴지는 감정, 느낌이 오늘따라 많다.
백년폭포 위쪽에서 병풍바위 쪽으로 바로 오르는 등산로와 백년폭포 아래쪽 다리를 건너면 운악산을 크게 돌 수 있는 주능선 산행코스가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게 됐다. 언젠가 다시 오더라도 그 코스는 너무 길어서 시도해 보지 않을 것 같다. 일주문을 뒤로하고 주차장에서 운악산을 돌아보니 운악산은 겉보기에는 얕은 바위산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들어가 보면 그 깊은 계곡과 높이를 느낄 수 있는 산이 운악산이다. 같이 산행한 후배와 정장에서 1330-44 버스를 타고, 대성리에서 서울로 오는 버스를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 교통 팁 (1330-44 버스 기사님이 직접)
"사람들이 대성리에서 기차 타고 환승하면 빠른 줄 아는데, 1330-44는 결국 1시간에 1대, 청량리역 기준 매시 35분, 상봉역 50분 정도에 지나니 그 시간에 맞춰 타는 게 가장 빠르다"
산 행 지 : 운악산(해발 935미터, 경기 가평, 포천)
산행날짜 : 2017년 9월 9일
날 씨 : 맑음
산행 시간 : 3시간 40분(13:10~16:50)
산행 코스 : 운악산 주차장 - 눈썹바위 - 병풍바위 - 만경대 - 운악산 정상 - 남근바위 - 갈림길 - 현등사 - 운악산 계곡 - 주차장
일 행 : 2명 (맑은물, JM)
교 통 : 수도권 교통(전철-광역버스)
#사진으로 보는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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