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26. 17:36ㆍ북한산특집
2024년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린다. 북한산이 하얀 눈으로 덮인 날에는 산에 가고 싶은 욕구가 차올랐지만, 2월 말까지 달성해야 할 목표가 있어서 꾹 참는다.
절기로 우수가 있는 2월 세째 주. 장마처럼 며칠동안 비가 오다가 주 후반에 큰 눈이 내렸다. 때 마침, 주말에 1차 시험 목표를 달성하게 되어, 다음날 바로 북한산을 찾는다. 이번 산행은 1차 목표를 달성한 나를 위한 선물이기도 하다.
북한산 주능선에서 일출을 맞이하고 싶어 일찍 일어났으나, 컴컴한 밖을 보니 혼자 산행할 마음이 사라진다. 바깥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을 나와 북한산으로 향한다. 동쪽 하늘은 이미 붉게 물들고 있는데, 서쪽 하늘은 아직 시커멓다. 북한산 봉우리에서 일출을 보기에는 늦었지만, 서두르면 중간 능선 어디쯤에서 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릉 청수계곡에서 출발하여 내원사 가는 길에서 북한산 형제봉 능선에 걸려있는 둥근달을 본다. 대보름이 이틀 지났지만, 소나무와 어울리는 둥근달의 모습은 한 폭의 한국화 같다. 지는 달을 뒤로하고 뜨는 해를 보기 위해 내원사를 지나 눈 쌓인 산길을 빠르게 오른다. 칼바위 주능선에 일출 예정시간 보다 2분 늦게 도착했는데, 동쪽 지평선을 막 떠난 아침 해가 붉게 빛나고 있다. 인수봉, 도봉산의 바위 봉우리는 눈이 덜 녹은 모습으로 충분히 아름다운데, 붉은 아침 햇살을 받아 더 아름답다. 장엄한 일출 순간은 놓쳤지만, 포기하지 않고 달려와 일출 직후 북한산의 신비로운 느낌을 맛본다.
아침 햇살을 등에 질머지고 문필봉을 향한다. 북한산 능선길은 며칠 전 내린 폭설로 발이 푹푹 빠진다. 강원도 높은 산의 눈길 산행을 가까운 북한산에서 경험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인내의 보상으로 눈산행을 받은 것 같다. 나뭇가지 사이로 아파트 숲이 보이지 않는다면,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겨울산에 온 것으로 착각할 만큼 눈이 많다.
'나'라는 존재는 어차피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잠시 시공간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왜 세상을 생각하고 묶여 있는 것일까?
산행에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가, 혼자 산에 가면 세상과 단절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산에 가보면 그렇지 않다. 누구는 산에 와서도 뉴스를 듣고, 음악을 듣고 있다. 조용히 산을 걷는 사람도 속으로는 세상 생각을 하고 있다. 마음 수련을 잘한 사람도 세상 사람들과 같은 하늘에서, 같은 공기로 숨을 쉬고 있다. 산행이든 무인도행이든, 세상과 단절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숨을 쉬고 살아가고 있는 한!
또 한 가지, 산에 가서 마음을 비울 수 없지만, 그나마 가벼워지는 순간이 있다. 오르막을 오를 때는 심장을 펌핑하는데 에너지가 쓰이며, 잡생각 회로가 잠시 꺼지게 된다. 또한, 꽃향기, 풀향기 가득한 숲 속을 걸을 때, 새소리, 벌레소리, 폭포소리가 들릴 때 잡생각은 사라진다. 폭설이 내린 북한산 풍광에 빠져 걷다 보니 복잡한 생각이 사라져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나는 칼바위능선 정상 석가봉에 올라와 있다.
북한산에 조망이 뛰어난 장소가 여럿 있지만, 칼바위능선 정상에서 보는 세상은 최고다. 북쪽으로는 흰구름 대신 흰 눈과 어울리는 백운대, 인수봉, 도봉산까지 이어지는 하얀 능선, 동쪽으로 중랑천 물안개와 그 너머 수락산, 불암산, 남쪽 서울은 아침 안개 사이로 몇몇 고층 건물이 삐죽 솟아 있어 마치 스모그 가득한 인더스트리아 같다. 남산과 서울 N타워도 안개 위로 솟아 있다. 서쪽으로 보현봉과 형제봉, 남장대 능선은 하얀 눈이 그대로 남아 있어 아름답다. 가능한 한 빨리 산행을 하려고 했지만, 아침 8시 북한산 높은 봉우리에서 보는 하얀 세상은 계속 더 바라보고 싶다.
석가봉을 내려와 북한산성에 도착하니, 발자국이 많은데 눈은 그대로 쌓여있다. 공사 중인 보국문을 지나 북한산성을 따라 성덕봉에 오른다. 평소에도 석가봉 못지않은 조망 명소인데, 오늘은 설경이 더 멋지다. 북한산성 성곽 아래로 하얗게 이어지는 청수계곡, 보현봉에서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하얀 능선, 방금 전 지나왔던 칼바위 능선, 멀리 아침 안갯속 서울. 그리고 무엇보다 눈과 어울려 있는 북한산 백운대의 모습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이어지는 대성문에서 바로 하산하려다 혹시나 상고대를 볼 수 있을까 하여 보현봉 갈림길 봉우리(잠룡봉)로 향한다. 대성문보다 100미터가량 높아 날씨에 따라 상고대가 있기도 하지만, 오늘은 상고대 대신 눈과 고드름이 나무 가지마다 붙어 있다. 일부 가지는 주중 습설의 무게를 못 버티고 부러져 있다. 나뭇가지에 맺혀 아침햇살에 빛나는 눈과 얼음은 동화 속 겨울정원 같다. 잠룡봉 북한산성의 하늘문에 맺힌 고드름은 공인받지 못한 서울 최고의 고드름이다. 잠룡봉 주변에 상고대는 없지만, 북한산성 성벽은 며칠 내린 비가 바로 얼어붙어 반질반질한 유리코팅 성벽이 되었다. 옛날 겨울에도 전쟁을 했다면, 성벽에 물을 뿌려 얼려놓으면 한동안 철통보다 더 튼튼한 빙벽요새가 되었을 것 같다.
잠룡봉에서 대남문 방향으로 약 50미터 더 진행하여 남서쪽으로 멋지게 이어지는 비봉능선과 문수봉을 바라보고, 대성문으로 돌아온다. 대성문에 비추는 아침햇살 또한 아름답다.
눈은 쌓여 있지만 봄을 앞두고 졸졸 흐르기 시작하는 정릉천 발원지를 지나 일선사 갈림길 전망대에 도착한다. 험한 칼바위능선이지만 여기에서 바라보면 부드럽게 성북구로 내려앉은 모습이다. 동쪽으로 시야가 좋아 천마지맥과 운길산-예봉산 능선이 선명하고 그 뒤로 양평 용문산과 백운봉까지 잘 보인다.
영취사로 하산 하려다, 오늘은 직진하여 보토현 방향으로 간다. 형제봉은 오르지않고, 청수계곡 영취사 방향에 있는 만생샘 갈림길로 접어든다. 평일 오전이라 아무도 없지만 만생샘은 물을 뿜어내고 있다. 만생샘물을 한바가지 받아 마시니 속이 시원해진다. 만생까지는 생각할 필요 없고, 현생에서 이렇게 시원하게 살아보자. 만생샘에서 200미터 아래에 있는 무명샘 약수에 도착해서 한 바가지 약숫물을 마신다. 시원해지는 가슴, 뱃속이 좋다.
영취사 갈림길을 만나 청수계곡 지류를 따라가다, 청수교에서 청수계곡 본류를 만난다. 북한산 정릉지구 탐방안내소로 돌아와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산행지: 북한산 문필봉-칼바위능선-북한산성-잠룡봉-청수계곡
날 짜: 2024년 2월 26일
날 씨: 맑음
일 행: 단독산행
산행코스: 정릉 청수계곡-문필봉-칼바위능선-북한산성(보국문-성덕봉-대성문-보현봉 갈림길)-대성문-보토현-청수계곡
산행시간: 4시간 10분 (6시 40분~10시 50분)
교 통: 도보 (참고, 정릉 청수장, 110A•B, 162, 143, 1020, 1113번 버스)
[포토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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