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26. 10:23ㆍ산행일기
여름성수기 대관령 휴양림 당첨!
여름휴가, 친구 만남, 여름 산행까지 일석삼조를 누릴 베이스캠프가 마련되었다.
대관령 휴양림에서 가까운 산행을 하려다, 명산 오대산을 다녀오기로 한다. 휴양림에서 하룻밤 보내고, 옛 영동고속도로로 대관령을 넘어 진부면 월정사 입구로 향한다. 월정사 1km 앞둔 지점에 입장료와 주차요금을 받는 톨게이트 형식의 매표소가 생겼다. 예전에 월정사 전나무숲 근처에 있다가 아래로 내려온 것으로 요금은 5000원이다. 다소 비싸 보일 수 있으나 하루종일 주차할 수 있으니 합리적이고, 요금 징수과정에서 불필요한 갈등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인 듯하다.
월정사 앞을 지나 상원사 가는 10km 구간에는 길가로 곧은 전나무, 시원한 숲과 청량한 오대천이 보인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오대천 옆의 선재길을 걸어보고 싶다.
상원사 탐방안내소 주차장은 수십대 주차가 가능할 정도로 넓어서 단풍철만 피하면 주차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안내 사무소에서 산행지도를 챙기고 버스 회차구역 옆 상원사 등산로를 찾아 산행을 시작한다. 초입부터 100년 이상 된 큰 나무가 있어 큰 산이라는 느낌이 든다. 팔다리와 어깨를 풀며 걷다 보니 5분 만에 상원사 입구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상원사 안으로 들어서니 금동 봉황이 멋지게 솟아 있다. 파란 하늘과 흰구름을 배경으로 하는 상원사 모습이 아름다워 국보인 상원사 동종은 보지 못하고 상원사를 나왔다.
중대 사자암까지 숲 속 계단길이 이어진다. 계곡 물소리와 산새 소리가 있고 흙냄새와 숲 냄새가 좋다. 이미 해발 1000미터 이상 고지에 나무 그늘이라 7월 무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불경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더니 중대 사자암이 나타난다. 딱새 한쌍이 나를 의식하며 주위를 맴돈다. 어쩌면 주위에 둥지가 있을 수 있다. 중대 사자암 앞뜰에서 고운 단청, 파란 하늘에 떠가는 흰구름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으니 내 마음도 구름처럼 가벼워진다. 얼굴을 스치는 산바람에 땀과 번뇌가 같이 증발된다.
적멸보궁 가는 길은 현무암 계단길이다. 부도모양 조형물 안쪽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불경소리가 꽤 크게 들린다. 해발 1100미터를 넘는 자연 공간이 인공적이고 종교적인 곳이 되었지만 불편한 마음대신 경건하고 차분한 기분이 든다. 내려오던 스님은 온화한 미소와 눈인사를 건네오고, 두 발을 모은 다람쥐는 합장하는 불자 모습으로 보여 마음의 인사를 건넨다. 중대 사자암 앞뜰에서부터 나는 이미 두둥실 구름이 되어 적멸보궁으로 향하고 있다.
용안수 샘을 지나 갈림길에서 계단을 따라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에 도착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뒤뜰에 합장 인사를 한다.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은 비로봉을 뒤에 두고 좌우로는 깊은 계곡이 흐르고 앞으로는 멀리까지 동대산 방향으로 하늘이 열려있다. 지도가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 어떻게 이리 좋은 장소를 선택했을까? 산행을 목적으로 왔기에 불교에 대한 사전 조사를 못했지만, 상원사 - 중대 사자암 - 적멸보궁 까지 이어지는 길은 우주와 자연, 종교,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불교 순례길 같은 느낌이다.
적멸보궁에서 돌아 내려와 비로봉 방향으로 들어선다. 1.5km 거리에 1시간 30분을 더 가야 한다. 이제부터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지키는 완전한 자연 숲길이다. 직경이 1미터를 훌쩍 넘으며 곧게 자란 나무를 보며 걸으니 경외감이 생긴다. 곧은 나무는 쓰임이 많아 단명하고, 굽은 나무는 장수한다며 꼼수를 옹호하는 세상에서 백여 년을 곧게 자란 나무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곧게 자란 나무는 나에게도 큰 위로가 된다.
비록 이 세상에 의미 있는 쓰임이 되지 못했지만 나무처럼 바르고 곧게 애쓰며 살고 있으니 됐다
'나도 잘 살아왔구나. 비록 이 세상에 의미 있는 쓰임이 되지 못했지만 나무처럼 바르고 곧게 애쓰며 살고 있으니 됐다'며 나 자신을 위로한다. 지금까지 살아왔듯 뿌리와 밑동은 곧게, 곁가지와 잎은 유연하게 세상과 소통하면 된다.
지금 오르는 이 가파른 길은 동고동락했던 고등학교 친구들과 성인이 되어 올랐던 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맞이한 첫여름에 함께 오대산을 찾았다. 당시엔 산행이 힘들었을 텐데 이제는 행복한 추억으로 각색되어 있다. 갓 스무 살 풋풋한 우정으로 가파른 길을 서로 도와가며 올랐던 기억, 내려와 빗속에서 야영하던 기억, 월정사까지 한참을 걷던 기억이 조각조각 남아 있다. 지나고 보면 산행에서 잠시 힘든 순간은 삶에서 보면 행복의 일부다. 이런 생각을 하며 오대산 숲 기운을 누리며 걸으니 몸은 더 가벼워지고, 산바람은 더 시원해지고, 풀과 나무는 더 아름답게 보인다.
비로봉 정상에 가까워 올 수록 나무의 키가 작아지고, 대신 야생화가 점점 많아지며 등산로 주변은 꽃 밭이 된다. 구릿대, 동자꽃, 나리꽃, 노루오줌, 이질풀... 이름을 아는 꽃보다 모르는 꽃들이 더 많다. 고운 빛의 꽃마다 벌레들이 모여들어 꽃가루와 꿀과 번식을 즐기고 있다.
오늘 산행에서는 모든 것이 막힘이 없고 자연스러워 마음의 온도가 내려간다.
적멸보궁까지는 순례길 분위기에 빠져서 산행을 했고, 이후 가파른 길은 추억과 숲 기운으로 산행을 했는데, 비로봉 아래 활짝 핀 야생화를 보며 즐거움에 푹 빠진다. 바쁘거나 각박한 상황이 되더라도 여름산 꽃 한 번쯤 볼 수 있는 여유는 꼭 누려야겠다. 아름다운 인생의 조각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
주변 높은 봉우리들이 시야와 평행해져 정상 부근에 다 왔겠거니 하며 언덕을 올랐더니 바로 비로봉이다. 중대 사자암, 적멸보궁, 곧은 나무, 산새, 야생화를 즐기며 힘들지 않게 올라왔다.
해발 1563미터 오대산 비로봉은 동서남북 360도를 둘러봐도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모두 짙푸른 산이다. 검은 회색구름과 파란 하늘이 조화롭게 어울려있다. 남동방향으로 풍력발전기가 서 있는 선자령을 찾고 옆으로 황병산을 찾는다. 남쪽으로 용평 스키장의 흔적이 있는 발왕산을 찾는다. 두로봉-동대산 능선은 꽤 길어 보인다. 북쪽으로 겹겹이 포개진 산 능선의 끝에 설악산이 보인다. 소나기가 내렸는지 설악산 대청봉 자락으로 하얀 안개구름이 피오 오른다. 설악산 서북능선의 안산과 가리봉도 보인다. 설악산으로부터 남쪽으로 이어진 백두대간은 봉우리는 황병산까지 이어진다. 북서쪽 홍천군의 높은 산들은 이름은 몰라도 그저 좋다. 가리산은 정상 바위 봉우리의 모습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정상에 서면 곧바로 내려가기 싫지만 다음을 위해 출발한다.
비로봉에서 상왕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험하지 않은 능선길이다. 작지만 단단히 자란 나무 아래는 초록풀과 야생화 천국이다. 햇빛을 많이 받은 나무들은 위쪽으로 자라니 아래쪽에는 키 작은 풀들이 자랄 공간이 마련된다. 나뭇잎이 햇빛에너지를 쓰고, 아래쪽에서 풀들이 남은 햇빛을 쓰니 땅까지 도달하는 햇빛은 거의 없다. 소중한 태양에너지를 아낌없이 활용하는 여름 초록덮개(*미국 작가 마이클 조던의 초록덮개, Green Mantle)가 만들어졌다. 에너지 활용을 위한 치열한 야생의 현장인 동시에 빗물의 과도한 흐름을 막고, 과도한 증발을 막는 자연스러운 공간이 만들어졌다. 어쩌면, 자연이란 그 자체로 가장 위대한 과학일지도 모르겠다.
여름 야생화는 곤충에게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벌, 등에, 나비, 꽃무지, 풍뎅이가 꿀과 꽃가루를 먹기 위해 꽃을 찾는다. 여름이 짧고 변덕스러운 높은 산에서는 짧은 시간에 많이 먹고 빨리 번식에 성공해야 한다.
비로봉-상왕봉 능선은 또한 새들의 천국이다. 작은 새들이 잡목 사이를 옮겨 다니며 떠들썩하게 울어댄다. 그중 휘파람새의 청아한 노랫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감상하는데 머리 위로 쉬익! 쉬익! 바람소리가 자꾸 들린다.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렸더니 제비보다 큰 새가 엄청난 속도로 휙 지나간다. 산행도 좋은데 신기한 새까지 보니 운이 좋은 날이다.(나중에 찾아보니 칼새)
비로봉-상왕봉 능선은 1400미터를 넘지만 표고차가 크지 않아 30여분 만에 상왕봉에 도착한다. 이제 북쪽 두로봉이 가까워졌고, 홍천군 산과 설악산도 가까워졌다. 하늘을 뒤덮었던 먹구름이 이제 하얀 뭉게구름이 되어 흘러간다. 상왕봉을 지나면 내리막길이 많아진다. 안내표지판에 표시된 해발고도는 여전히 1300미터 이상이다. 한적한 등산로에서 마주치는 사람 없이 상왕봉 삼거리(북대미륵암 갈림길)에 도착한다. 두로령 산행길과 북대미륵암 산행길은 같은 방향으로 약 30도 정도 갈라지는데 이정표는 90도로 표시되어 있다. 이정표 방향으로 두로령길을 간다면 홍천내면 쪽으로 내려가다 길을 잃고 말 것이다. 누군가 '등산로 없음'이라고 표시를 해 두었지만 국립공원공단에서 고쳐야 할 부분이다. 나는 조금 길게 걷기 위해 두로령 방향을 선택했는데,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은 듯 산철쭉 나뭇가지가 등산로까지 자라고 있다. 오싹함이 느껴질 만큼 한적한 등산로지만, 여름 한낮이라 안심이 된다.
갈림길을 떠난 지 30분 만에 백두대간 두로령 안내석이 있는 임도에 도착한다. 백두대간은 동쪽 500미터 지점의 두로봉에서 남북으로 이어지는데, 한강기맥 두로령에 백두대간 안내석을 세워놓은 것은 조금 억지스러운 것 같다.
이제부터는 산행길 대신 임도를 따라 걷는데 숲이 아니다 보니 햇살이 뜨겁다. 배낭에 묶어 둔 등산모자를 찾는데 없다. 두로령 못 미쳐 한적한 산길에 떨어트린 것 같다. 쓰레기로 남지 말고 누군가 주워 잘 사용했으면 좋겠다.
비로봉-상왕봉 위쪽 하늘에 흰 뭉게구름 대신 검은 먹구름이 모여든다. 일기예보에는 4시 전후로 소나기가 내릴 수 있다고 하여 서둘러 보지만 5시간 넘게 산행하다 보니 마음먹은 대로 속도가 나지 않는다. 북대미륵암 근처는 최근 공사를 많이 하여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고, 북대미륵암 부속 건물로 보이는 신축건물은 호텔처럼 으리으리하다. 오랜 시간 자연이 어울려 만들어진 오대산 공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교 건축물에 실망감이 생긴다.
임도를 따라 조금 더 내려오니 상왕봉삼거리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난다. 거기에서 두로령을 가지 않았더라면, 바로 이 길로 내려왔더라면 북대미륵암에 실망하지 않았을 텐데... 이미 지나간 시간, 이미 지어진 건물, 이미 달라진 종교, 이미 불편해진 내 마음이다.
오대천 최상류 물소리가 임도 옆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 험한 계곡을 흐르는 물은 침묵하지 않는다.
소명골로 바로 내려가는 길은 지도에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멸종위기 동식물의 서식지라 출입금지 지역이다. 지름길이 없으니 이제는 임도를 따라 구불구불 내려가야만 한다. 산 중턱을 깎아 만든 임도는 한적하게 걷기 좋지만, 작은 산사태가 많이 발생했다. 수습 한 곳도 있고, 복구공사 중인 곳도 있고, 무너진 토사물은 계곡 아래쪽으로 밀어낸 곳도 있다. 나무와 산새와 바람과 구름은, 꽃과 나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현생을 보내지만, 자연은 가능한 스스로 변하길 바라는 내 마음에 불편함이 생긴다. 이제는 북대미륵암에 오가는 자동차를 위해서만 사용되는 임도가 산사태등 훼손을 부추기고 있다. 국립공원공단과 지자체는 자연을 훼손하는 임도에 많은 세금을 투입하고 있다.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북대미륵암으로 달려가는 스님의 외제차를 보니 그 마음이 더 강해진다. 너른 자동차길 대신 걷기만 가능한 길로 전환하자면 힘센 권력이 가만있지 않겠지?
너른 임도 옆으로 노루오줌은 쉼 없이 피어있고 나비는 그 꽃을 찾고, 끊임없이 물이 흐르는 골짜기에는 새소리가 가득하다. 오대산 높은 산 깊은 골을 느낄 수 있는 곳인데, 임도대신 등산로로 가자.
산사태 복구공사 중인 소명골 입구를 지나 상원사탐방안내소 입구의 주차금지대가 보인다. 예상보다 긴 6시간을 넘는 여름산행이다. 마지막 임도에 아쉬움이 많았지만, 여름 오대산의 자연에 계속 푹 빠져있고 싶다.
산행지: 오대산 비로봉(1563m) - 상왕봉(1491m), 강원 평창군-홍천군
날 짜: 2024년 7월 26일
날 씨: 맑음
일 행: 단독산행
산행코스: 상원사 주차장 - 상원사 - 적멸보궁 - 비로봉 - 상왕봉 - 두로령 - 북대미륵암 - 임도 - 상원사 주차장
산행시간: 6시간 10분 (10시 25분~4시 35분)
교 통: 승용차 이용 (상원사 주차장 이용 가능)
[포토 산행기]
'산행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심보다 먼저 찾아온 가을, 인왕산-백악산 (2024.10.17) (2) | 2024.10.17 |
---|---|
푸른 하늘과 호수가 아름다운 월악산 악어봉 (2024.09.15) (2) | 2024.09.27 |
관악산이 높다한들 구름 아래 뫼이로다 (2024.6.15) (2) | 2024.06.15 |
5월 소백산 초원의 하얀 눈 '몽유설산행기' (2024.5.17) (0) | 2024.05.18 |
다시 초록산으로. 하남 검단산-용마산 종주(2024.4.28) (0) | 2024.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