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2. 23:54ㆍ산행일기
일요일 오후에 집에 혼자 있다가 광화문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 오늘은 조금 특별하게 걸어서 광화문까지다. 정릉에서 광화문까지. 스스로 생각해도 그럴싸한것 같다. 큰 산에 대한 욕심만 키우다 가을이 다 지나고 있으니, 할 수 있는 산책 같은 산행, 혹은 산행 같은 산책을 하기로 한다.
북한산 둘레길 명상의 길 구간에 올라서니 북한산에 올랐던 사람들이 많이 내려온다. 형제봉능선 동쪽사면이라 해가 일찍 져 4시도 되지 않았는데 그늘이 진다. 이 계절 이 시간에는 큰 산밑에 그늘이 빨리 지는게 당연하다. 이를 일반화하여 큰 산 아래는 그늘이 지니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상황과 맥락을 봐야 하는데, 요즘은 단편적 지식으로 세상을 판단 내리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이 많다.
둘레길을 따라가기 보다 형제봉 능선길을 따라간다. 여름에는 우거진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던 북한산성 주능선, 칼바위능선이 이제는 나무가지 사이로 보인다. 이런거 보면 세상에 영원히 가려지는 것은 없다. 영불사 갈림길에서 아래로 내려가 다시 명상의길을 만나 형제봉 삼거리 방향으로 오른다. 산속에 데크 계단이 점점 많아 지고 있다.
형제봉 삼거리를 지나 북악산 방향으로 가다보니 왼쪽 100미터 지점에 바위 봉우리가 보인다. 이 길을 몇 번 지나갔었지만 이 바위 봉우리는 오늘 처음 눈에 들어왔다. 원래 바위봉우리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내가 몰랐기 때문에 나는 이 바위가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세상의 진리, 다양함에 대해 내가 다 안다거나 옳다고 단정하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내가 모른다고 존재하지 않는것이 아니다.
등산길을 따라가니 왼쪽으로 바위봉우리로 통하는 길이 있다. 30미터 정도 가보니 작은 바위봉우리가 2개 나온다. 오른쪽 바위봉우리에서는 큰 바윗덩어리가 아래로 떨어져 있다. 아직 북한산의 풍화침식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왼쪽 바위봉우리에 올라가니 주위 조망이 장관이다. 숨겨진 멋진 전망대인데, 나중에 찾아보니 인디언바위로 불린다고 한다.
여기서 보니 형제봉이 대장이다. 형제봉 서쪽으로 평창동, 동쪽으로 정릉으로 향하는 형제봉 능선, 그 뒤로 칼바위와 문필봉, 동쪽으로 수락산, 불암산, 용마산, 아차산, 예봉산, 검단산, 잠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이렇게 멋진 조망을 볼 수 있는 바위봉우리가 있었다니 참 오래 산행하고 볼 일이다.
여래사를 지나 북악하늘길을 만난다. 팔각정을 지나 삼청동으로 내려가려다가 구진봉 쪽으로 넘어가 보기로 한다. 북악스카이웨이를 가로지르는 바위 육교를 지나 조금 걸으니 북악산 하늘 전망대가 나타난다. 지나왔던 인디언 바위만큼이나 북한산과 서울시내 전망이 좋다. 계속하여 구진봉 호경암 방향으로 걷는데 이 길 대단하다. 호젓하게 산행을 하며, 주변 풍경이 아주 좋은데, 해발 약 300미터 능선이지만 고도감이 느껴진다. 정릉과 성북동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길이다.
이 길은 북악산사길과 연결되어 있어서 호경암도 암자인 줄 알았는데, 봉우리에 올라 표지석을 보고 나서야 호경암이 봉우리 이름인 것을 알았다. 호경암은 인디언 바위처럼 작은 바위봉우리지만 남쪽으로 남산과 주변 서울 시내와 얕은 산들이 한눈에 펼쳐진다. 백악산 조망은 곡장과 팔각정 밖에 몰랐는데, 가까운 곳에 이런 훌륭한 풍광 명소가 있었다니... 기쁜 마음과 함께, '내가 걷는 이곳이 바로 명산이다'라고 몇 년 전 깨닮음을 그새 잊고 지냈던 것 같다.
호경암 아래에는 1.21 사태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은 바위에만 새겨져 있는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북의 상처가 아물고 남북이 가까워질 줄 알았는데, 50여년이 지나도 갈등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위처럼 딱딱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일까?
갑자기 엄청난 급경사 길이 시작된다. 이쪽으로 내려가니 다행이지, 올라왔으면 거의 설악산 봉정암급 급경사에 쓰러졌을 것 같다. 너무 심한 과장이겠지만, 한동안 이어지는 계단길을 내려가니 안도의 웃음이 나온다. 백악산 옆으로 지는 해를 보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와 샘이 있는 작은 골짜기를 두어개를 지났는데, 또 오르막길이 나온다. 호경암 윗길은 생각보다 높고 평탄했는데, 여기 골짜기는 생각보다 깊어 여름에는 꽤 체력소모가 많을 것 같다.
급경사 언덕을 넘었더니 성북천 발원지다. 늦은 시간이라 장난치는 고양이만 있는 성북천 발원지는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같이 왔다가 목마를 태워 걷던 생각이 난다. 성북천 발원지까지 오는 길과 깊은 골짜기를 생각해보니 성북천 정도의 하천이 형성되려면 역시 높은 산에 깊은 골의 배경이 필요 했던 것이다.
한 방울 지하수를 뿜어 내기 위해 산은 그렇게 깊었나 보다.
엄혹한 여름 폭우에 흔들림 없이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흘러 넘치면 넘치는 대로 산은 빗물을 머금고 그저 한방울 한방울 내려 보낸다. 성북천 발원지뿐만 아니라 주변의 작은 골짜기 물들이 모여들이 성북천이 되어 흐른다. 오랜 세월 형성된 자연의 질서라는 게 참 대단하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마음은 모르듯, 눈앞에 얕게 보이는 산도, 들어가 봐야 그 깊이를 알 수 있다. 호경암에서 성북천 발원지로 내려오며 마음속에 내려앉은 생각이다.
5시가 넘은 시간, 주변이 어둑어둑해진다. 바로 아래 삼청각을 지나 성북동으로 내려갈까? 아직 깜깜한 것은 아니니 일단 말바위안내소 근처에서 와룡공원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와룡공원에서 마을버스를 타는 것이 가장 빠를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아내와 통화하여 삼청공원을 지나 광화문으로 가기로 한다. 갈 길이 멀어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니 한양도성이 바로 옆이다. 성북동에도 저녁이 내려왔지만, 산 아래 골짜기만큼 어둡지는 않다.
말바위안내소를 지나서 삼청동까지는 한 달 전 친구 KGB와 내려간 길과 같은 길이다. 말바위전망대에 도착하니, 기대하지 않았던 서울 도심 야경과 저녁노을이 펼쳐져 있다. 검푸른 하늘 아래 선명한 주황색 하늘, 그 아래로는 도심 건물의 별빛이 반짝인다. 풍광에 빠져 있는데, 하늘에서 끼루룩 끼루룩 새 소리가 나서 찾아 봤더니 저녁 노을 속으로 한 무리의 새들이 날아간다. 아름다움은 이렇게 한순간 스쳐 지나가는구나, 가을도, 저녁노을도, 철새도. 삶은 어떨까?
그 답을 생각하기에는 주위가 너무 어두워져 있다. 더 늦기 전에 어렴풋 보이는 계단길과 야자수 매트길을 뛰어 삼청공원까지 10여분 만에 내려온다. 어물쩍 거리다가 더 어두워지면 내려오는 시간이 2배, 3배 늘어나기에 다소 무리해서 내려왔다.
삼청공원 후문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광화문에서 가족을 만난다. 걸어서 가족을 만나려던 계획이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짧은 시간 제법 멋진 산행을 했다.
#산행정보
산행지: 백악산 호경암 (서울시 성북구 종로구)
날 짜: 2024년 11월 17일
날 씨: 맑음
일 행: 맑은물
산행 코스: 북한산 국립공원 정릉탐방안내소 - 명상의 길 - 형제봉 갈림길 - 하늘전망대 - 호경암 - 말바위전망대 - 삼청공원
산행시간: 2시간 40분 (3시 10분~5시 50분)
교 통: 정릉탐방안내소(서울 시내버스), 삼청공원 (종로 마을버스)
#포토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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