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진눈깨비 예보와 달리 북한산 6부 능선 위로 하얀 눈이 내렸다.
북한산에 이 정도 눈이라면 강원도 산은 더 좋겠지? 더 좋은 산이 있겠지? 남의 떡이 커 보이듯, 남의 동네 산이 더 멋있을 것 같다. 아니다. 오늘은 산세, 산맥 고려 하지 말고, 지도를 상상하지 말고 눈앞에 보이는 하얀 북한산으로 그냥 들어가자.
생각을 따라 곧바로 배낭을 준비하여 북한산으로 끌려들어 가듯 발걸음을 옮긴다.
누군가에게 나의 산행 기록, 사진을 보여줄 생각도 내려놓는다. 하나 확신하는 것이 있다. 눈길을 걸으면 무효한 고민은 사라지고 무수한 감정, 생각이 쏟아질 거라는 것.
청수계곡 얼음은 거의 사라졌다. 겨울이 가고 곧 봄인가 싶었는데, 한 번에 되는 것은 없다.
대성능선을 따라 10여분 오르니 짙은 녹색 소나무 위로 하얀 눈이 내려 앉은 능선이 보인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하얀 봉우리들은 설악산에서 잠시 놀러 온 것 같다. 6부 능선과 7부 능선 사이에서 눈의 운명이 갈려 산의 색깔이 다르다.
해발 400미터를 넘으며 5cm에 가까운 눈이 쌓여 있다. 오늘 적설량은 고도에 비례한다.
계곡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은 아직 차가운데, 눈 속을 걸으니 허허허 하고 웃음이 쏟아진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 산이니 미친 듯 웃든, 소리를 지르든 자유다. 물론, 누군가 만나면 안 그런 척할 것이다.
일선사 갈림길에서 보현봉 아래를 돌아 대성문 가는 길에는 더 많은 눈이 쌓여 있다. 한두명 지나간 길에 나무에 눈이 쌓여 완전한 백설세상이다. 12월 초겨울 새하얀 함백산, 2월 초 북한산 눈 산행에 이어, 초봄에 또다시 북한산 눈 산행을 하고 있다. 올해 겨울이 짧고 강렬한 추위에 비해 눈이 아쉽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운 좋게 설산을 많이 다니고 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눈 길을 걷고, 혼자 셀카 놀이를 하고, 눈을 뭉쳐보기도 하고, 아무도 듣지 않는 감탄사를 남발한다. 산에서 맞이하는 하얀 눈은 행복이다.


대성문 누각 지붕에 고드름이 경사져 있다. 거센 바람이 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대성문을 지나 북한산성을 따라 보현봉 방향으로 가는데 성곽에도 사선으로 자라는 고드름이 많다. 바람이 불 때마다 위에서 후드득 얼음 조각이 떨어진다. 자세히 보니 3가지 다른 현상의 결과다.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눈, 나뭇가지를 코팅처럼 감싼 얼음, 상고대까지 기상현상을 한곳에서 볼 수 있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진 상고대 조각은 마치 피자 위에 듬뿍 뿌린 피자가루 같다.
보현봉에 근접한 북한산성을 지나 대남문으로 내려가는 성곽 옆으로는 60~70cm 높이로 눈이 듬성듬성 쌓여 있다. 성곽 틈새 바람이 부서지는 파도 같은 모양의 눈 더미를 만들어놓았다.
한 어른이 문수봉 주위를 맴돌며 개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냥 지나가며 부르는 줄 알았더니 내가 문수봉에 10여분 머무는 동안 계속 이름을 부르고 개는 나타나지 않는다. 몇 년 전 봤던 그 누렁이를 찾는 것인지, 또 다른 유기견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설산을 헤매는 개를 목놓아 찾는 저분에게는 그 개가 진정한 반려견인 것 같다.


문수봉에서 청수계곡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을 바꿔서 비봉으로 내려간다. 청수동암문 우회로로 내려가려다 어려운 바윗길로 향한다. 여전히 눈이 10cm 가까이 쌓여있지만, 바닥까지 얼은 건 아니고 손잡이가 잘 되어 있어 괜찮겠지 하고 내려간다.
급경사 어려운 바윗길을 내려가며, 엄청난 후회가 몰려온다. 오지 말았어야 하는 길이다. 눈 아래 얼음이 없는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따뜻해진 날씨가 눈이 녹고, 눈 옆으로 물이 철철 흘러내린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이기에 한 번 두 번 세 번 조심하여 겨우 험한 구간을 벗어난다. 이런 무모한 산행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문득 20여 년 전 여름에 철재 난간이 없던 시절 이 구간을 올랐던 기억이 떠 오른다. 비봉능선을 따라 문수봉 우회로 갈림길에서 괜찮겠지 하고 들어선 험한 바윗길. 난간도, 밧줄도 없던 구간을 부들부들 떨면서 겨우 올랐었다. 다시는 위험구간을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오늘 다시 그 길로 들어가 내려오게 되었다. 그 여름 위험을 감수하고 올랐던 그 길을 반대로 위험을 인지하고 내려온 것이다. 어쩌면 이 길이 내 인생이 이미 전환되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다. 어쨌거나 더 이상의 모험은 금지다.
눈 덮인 산이니 오늘은 설경에 시선을 고정하고 빠른 걸음으로 내려간다. 오를 때와 반대로 고도가 낮아지며 눈이 점점 줄어든다. 승가봉에 올라 의상능선, 문수봉,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풍광을 돌아본다. 하얀 눈이 쌓인 산은 잠시 안녕했다가 첫눈 오면 다시 만난다.

아침에 설경에 이끌려 산으로 왔고, 기대 이상의 엄청난 설경을 보았기 때문에 발걸음이 가볍다. 위험구간이 있는 비봉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우회로로 돌아 지나간다. 향로봉을 앞두고 구기계곡으로 바로 내려간다.
정상에 올라 본 사람, 목표를 어느 정도 이룬 사람은 기꺼이 내려설 수 있다. 목표했던 지점에 오르지 못했던 내 삶의 길에서 내려가는 길이란 무엇일까?
계곡 중간 무렵 금선사 갈림길이 있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 기억을 더듬어 보니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이 모셔진 곳이다. 김종철 선행과 많은 교류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선생의 책과 글, 강연을 들으며 녹색세상을 꿈꿨었다. 발걸음이 금선사로 향한다. 금선사 풍경소리,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니 선생이 행복하게 쉬고 있을 것 같았다. 금선사를 뒤로하고 나오는데 멀찍이 광화문 일대 건물숲이 보였다. 절묘한 위치다. 자연 속에 고립된 생태문명이 아니라 현실에서 더 나은 생태문명을 꿈꿨던 노학자의 영혼이 머무르는 위치가 그의 생전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선사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도시가 시작된다. 눈이 가득했던 시간이 방금 전이고, 자연이 가득했던 세상이 방금 전인데, 지금은 겨울의 흔적이 전혀 없는 회색도시에 따뜻한 봄이다. 내가 진짜 눈을 보고 온 것인지? 꿈에서 눈을 본 것인지? 디지털 세상을 통해 눈을 느낀 것인지?
일장춘몽 같이 헷갈리지만, 내 눈 산행을 한 것은 맞겠지?
#산행정보
산행지: 북한산, 대성문-대남문-문수봉 (727m, 서울 성북구-종로구)
날 짜: 2026년 3월 3일
날 씨: 흐린 후 맑음
코 스: 정릉탐방안내소 - 대성능선 - 대성문 - 대남문 - 문수봉 - 승가봉 - 구기동
시 간: 4시간 40분 (9시 50분 ~ 14:30)
일 행: 혼산
교 통: 도보 & 대중교통 (구기동)
#포토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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