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속 두려움을 이겨낸 태백산 산행기(2002년7월1일)

2002. 11. 1. 22:33산행일기

한일월드컵 4강 진출 기념 임시휴일에 홀로 태백산 산행을 떠난다. 

새벽 3시, 태백역에 도착하니 이슬비가 내리고 있다. 역 전 편의점에서 커다란 가정용 손전등 사고, 택시를 타고 유일사 입구 매표소로 갔다. 나를 내려놓은 택시가 떠나자 유일사 입구 매표소는 정적만이 흐른다. 같은 기차를 타고 태백역에 내린 등산객들은 먼저 오른 것인지, 다른 길을 택한 것인지 보이지 않는다. 겨울에 한 번 오른 길이긴 하지만, 새벽 3시 조금 넘은 시간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태백산을 혼자 오르려니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다른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기도 뭐해서 혼자 산행하기로 결정한다.

비를 피하기 위해 방수겉옷을 입고, 손전등을 켜고 천제단 가는 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매표소를 지나 10여분을 올라가니, 마지막 민가의 불빛도 사라지고, 깊은 산속에는 나 혼자다.

적막함. 나뭇잎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만 뚝뚝뚝 들려오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어릴 적 시골집에서 듣던 '흐흐흐흐' 산새소리만 울려 퍼진다. '혹시, 산신령(?)이나 흰옷 입은 선녀(?)를 보더라도 절대로 놀라지 말자'고 중얼거려 본다.

"푸드드드득"

갑작스러운 소리에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고, 머리는 삐쭉, 등은 순식간에 땀범벅이 된다. 바로 옆에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른 것이었다. 

언제 산짐승이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 등뒤에는 누군가 자꾸 따라오는 것 같다. 무서움의 실체란 무엇일까?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인간을 보고 놀라 도망가는 산짐승이나, 산새가 무서운 것일까?

인간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등 뒤의 어둠이 무서운 것일까? 아니다. 그런 거짓 두려움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진짜 무서운 것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상황, 그래 난 전쟁이 가장 무섭다.

나와 같은 편이 아니면 곧 적이고 죽여야 하는 인간의 광기가 만들어내는 전쟁이 가장 무섭다.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이 같은 사람의 손에 죽어가는 섬뜩한 전쟁이 가장 무섭다. 빗방울 소리, 바람 소리, 산새 날개짓 소리는 살아있는 자연의 소리일 뿐이다. 마음은 점점 평정을 찾았고, 길 옆 나무의자에 앉아 간식을 꺼내 먹는다.

새벽 4시. 아직 어두웠지만, 근처 유일사에서 새벽을 깨우는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유일사 쉼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더 험해진다. 가파른 바위 길은 비에 젖어 미끄러웠고, 나무 사이로 난 길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다.
몇 걸음 옮기고 손전등을 비춰 방향을 잡고, 다시 걷기를 반복한다. 한참을 헤매며 올라가다 보니 반가운 주목이 보인다. 주목 군락지부터는 바위도 없고, 편한 길이 이어진다. 어렴풋이 날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산새 소리도 이제는 아름다운 노래로 들린다.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지만, 힘을 내기 위해 커다란 나무 밑을 찾아 밥을 먹는다.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 아직 주위도 잘 보이지 않는 이른 새벽에 비를 피해 밥을 먹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나온다. 산토끼 한 마리가 후다닥 지나가는데, 이제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어둠 속이지만 주목들을 살피며 천제단으로 향하는데, 작은 산새 한 마리가 앞에서 길을 안내한다. 몇 걸음 다가서면 앞으로 훌쩍 날아가고 다가서면 멀어지고, 녀석은 주목군락지가 끝날 때까지 친구가 되어 주었다.

주목 군락지가 끝나고 태백산 정상인 장군봉을 거쳐 천제단(천왕단)에 도착한다. 천제단 주위에는 무속인들이 독특한 신앙행위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제단 안쪽에서 굿 같은 행위를 하고, 다른 이는 제단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다. 

무속인들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거 혹시 날씨가 개지 않을까 기대하며 기다렸지만, 짙은 안개비에 일출은 물 건너간 듯하여, 천제단을 내려온다. 

망경사 앞의 용정에서 목을 축이고 문수봉으로 향한다. 등산화가 비에 젖어 묵직해졌다. 문수봉 가는 길에서 지난겨울 눈썰매를 탔던 기억이 떠오른다. 

비 오는 아침에 문수봉 정상 돌탑은 안개에 싸여 신비감이 느껴진다. 지난 겨울산행때는 4개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세어보니 돌탑은 모두 7개였다. 돌틈 사이로 다람쥐 한 마리가 주변을 살피고 있다. 다람쥐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려다가 이끼를 밟아 돌무더기 위에 넘어졌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지만,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문수봉 돌탑을 뒤로하고 당골 계곡으로 하산길을 정한다. 내려가는 길은 그리 험하지 않다. 나도 모르게 싱글벙글 표정관리가 안되고, 괜히 덩실덩실 춤이 나오고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새벽산행을 무사히 마치고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도 즐겁고, 상쾌한 아침공기도 기분을 좋게 하고, 어둠 속에서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도 즐겁다.

당골 계곡으로 내려오니, 아침 일찍 태백산을 찾은 사람들이 하나둘 보인다. 혼자서 산을 찾는 사람도 있고, 아침인데도 가족끼리 산을 찾는 사람도 있다.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그런지 너무 반갑다. 괜히 달려가서 인사를 하고 싶어 져, 큰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단군성전에 들렀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당골 광장으로 내려왔다. 날이 밝았지만, 여전히 태백산은 짙은 안갯속에 자신을 감추고 있었다.
오마이뉴스 기고 글 :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80183


산 행 지 : 태백산 (강원 태백, 1567m)
산행날짜 : 2002년 7월 1일
날   씨 : 맑음 (새벽산행)
산행코스 : 유일사매표소 --> 유일사(갈림길) --> 장군봉(태백산정상) --> 천제단 --> 망경사 --> 문수봉 --> 당골계곡 --> 당골광장
산행시간 : 5시간 10분(03:50 ~ 09:10)
일  행 : 맑은물 단독산행
교  통 : 대중교통 (중앙선 기차 & 버스)


새벽에 도착한 유일하 입구
태백산의 새벽
이른 아침 도착한 태백산 천제단
문수봉 돌탑 
망경사
태백산 주목
태백산 아래 공군 폭격장 경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