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4. 23. 18:28ㆍ전국산행일기
전날 밤 11시에 청량리역을 출발한 기차는 어둠 속을 달려 아침 7시가 되어서야 강릉역에 도착했다. 요 며칠 날씨가 포근했는데, 이른 시간이라 생각보다 춥게 느껴진다.
강릉역 앞에서 짐을 정리하고 바로 8시, 소금강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좌회전우회전 구불구불 헤매이는듯 하더니, 9시 넘어서 소금강 입구에 우릴 내려놓았다. 문을 연 몇몇 상점을 제외하고는 생각보다 황량하다. 당장, 아침 먹을 일도 걱정이다.
햇살이 있고 바람 피할 곳을 찾아 배낭을 내려놓았는데 화장실 옆이다. 지금 그런 것 가릴 처지가 아니라, 상점에 가서 물을 떠 와 밥을 하고 국과 라면을 끓여서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 먹는다. 산행을 위한 영양보충이 아니라, 밤새 기차여행에 쌓인 피로와 배고픔을 달래는 식사다.
아침을 먹고, 다들 결의를 다지며 산행을 시작한다. 이미 10시 30분이 지나고 있다. 1월 말 눈으로 유명한 영동지방이지만 눈이 없는 게 너무 아쉽다. 수도권과 중부지방은 수십 년 만에 폭설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오대산 소금강 계곡은 눈은 없고 겨울나무만 황량하게 서있다.
눈은 없지만 소금강 계곡 곳곳에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절경이 있다. 구룡폭포, 식당암, 십자소, 만물상, 오작담등 기묘한 바위와 하얗게 얼어붙은 계곡은 시원한 물이 흐르는 여름의 계곡과는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중간에 꽁꽁 얼은 계곡으로 내려가 겨울 계곡 트레킹을 한다.
낙영폭포까지 소금강 계곡은 경사도가 완만하여 힘들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2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는데, 앞으로 다가 올 급경사 코스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낙영폭포를 지나고 부터 갑자기 경사가 급해졌고, 지금까지는 거의 한 무리로 오르던 사람들의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가운데 그룹에서 여유 있게 사진을 찍고, 뒷사람들이 너무 처지지 않게 올라갔다.
경사가 급해서 조금 힘 들었지만, 왼쪽으로 거대하게 달려가는 백두대간의 웅장함이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이름을 알 수 없지만 지도상으로는 황병산과 매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일 것이다. 1시간 이상 가파른 경사길을 오르니, 시야가 트인 북쪽으로 백두대간 산줄기가 달려가고 있다.
이제 노인봉 정상 아래까지 올라왔는데, 지도상에는 노인봉으로 곧바로 오르지는 않고 노인봉 대피소를 거쳐 노인봉에 오르도록 표시되어 있다. 노인봉 대피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왠지 모를 운치가 느껴지는곳, 하룻밤쯤 묶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대피소였다.(15:30)
노인봉 대피소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뒷쪽의 노인봉 정상으로 올랐다. 정상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정상에 서니 눈을 보지 못해 느껴졌던 아쉬움이 달아난다. 남쪽으로 달려가는 백두대간 고원지대, 북쪽으로 뻗어 나가는 이름 모를 고산들, 동쪽으로는 푸른 동해바다! 눈까지 쌓여 있었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겠지만, 충분히 멋진 곳이다. 정상에서 내려가기 아쉬웠지만, 시간이 늦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16:20)
[노인봉 대피소]
노인봉 정상에서 하산을 시작한 시간은 오후 4시 40분!! 해가 짧은 겨울산행인데, 시간이 많이 늦었다.
늦었지만, 겨울산행을 설레게 하는 눈썰매를 타지 않고 내려갈 수는 없다. 눈이 쌓인 하산길은 훌륭한 썰매장이 된다. 등산로를 더 미끄럽게 만들어버려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준다는 사실에는 미안함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산에서 썰매 타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다. (혹시, 저희의 썰매로 미끄러워진 길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면, 이 글을 통해 사과하겠습니다. ^^;;)
눈이 많지는 않았지만, 중간중간 썰매를 즐길 만큼의 눈은 쌓여 있었다. 미리 준비해 온 비료포대를 잘라서 썰매를 만들었다. 눈이 적어 돌멩이에 엉덩이가 부딪치는 아픔쯤은 더 큰 즐거움을 위해 참아야 한다. 걷다가 눈이 쌓여있는 구간을 만나면 바로 썰매를 탔다.
[눈썰매 타기, (c) 먼발치에서]
진고개쪽 하산길은 짧기 때문에 1시간이 조금 지난 6시쯤에 밭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래서, 진고개쪽에서 노인봉을 오르는 코스가 더 쉽고, 일반적이라고 한다. 밭 옆길을 따라가다 보니 오른쪽으로 진고개산장(휴게소)이 있었고, 민박집을 찾아 계속 걸었다. 벌써 주위가 어두워졌다. 아스팔트 길이고, 날씨가 춥지 않아 크게 걱정은 안 하지만, 겨울산행에서 이런 늦은 산행은 안된다. 왜 이렇게 산행이 계획과 어긋났는지 생각해 본다.
민박집 차가 2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한길 사람들을 태워갈 동안, 아스팔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결국 3번째 돌아 온 차를 타고 민박집에 도착했다.
어젯밤에 기차에서 잠을 못 자고, 피곤했는지 많은 사람들이 이른 시간 꿈나라로 떠난다. 나를 비롯한 4명은 그동안 못다 한 얘기와 게임을 하며 새벽까지 자리를 접지 않았다. 새벽에 술이 떨어져 옆 비닐하우스에 있는 다른 산행팀에게 다음에 갚기로 하고 빌려(?) 오기도 했다.
다음날 회복한 사람들과 월정사에 들렀다. 93년 여름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왔었는데 10년 만에 다시 온 월정사다. 월정사지 8각 9층 석탑(?)은 기억나는데, 월정사 입구의 전나무 숲은 기억에 없다. 그래서 숲의 웅장한 나무들이 더 멋있게 느껴진다.
월정사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진부읍내로 이동하고, 동서울 가는 버스를 타고 인공적인 따뜻함이 있는 도시로 돌아왔다.
산행이 끝나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움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산행정보
산행지 : 오대산 노인봉 (1338미터, 강원도 강릉)
날 짜 : 2004년 1월 31일
날 씨 : 맑음
코 스 : 소금강 - 노인봉 - 진고개
산행시간 : 7시간 30분(10시 30분 ~ 오후 6시)
일 행 : 17명 (개똥이, 까마구, 강아지, 지요, 지리산바람, 지누, 헤이유, 하나사랑, 호옹, 귀니, 함께가자, MJ, 먼발치, 포비, 1인, 2인, 맑은물)
교 통 : 기차(청량리-강릉역), 버스(강릉역 - 연곡 소금감) / 버스 (월정사 - 진부, 진부 - 동서울)
#포토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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