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사이에 모든 산이 연초록연초록해졌다.
보고 있으면 계속 보고 싶어지는 빛깔이다. 산에 가기 좋은 계절이지만, 산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내 마음을 움직일 계기를 찾다 보니 오늘이 4.19 혁명 66주년이다. 가까운 북한산을 넘어 4.19 민주묘지까지 걸어가면 오늘 하루가 의미 있을 것 같다. 아내에게 같이 가자고 하니 "알았어"라고 한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어보니, "어, 갈께"라고 한다. 이렇게 쉽게 산에 갈 사람이 아닌데 왜 그러지? 4월 초 서대문 안산 산행이 괜찮았던 걸까? 어쨌든 함께 갈 수 있으니 좋다. 오후에 일이 있는 아이에게 물어보니, 당연히 안 간다고 한다. 혼자 점심을 먹을 나이가 되었지만, 아내와 둘이 집을 나서려니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집 앞에서 김밥을 사고 청수계곡으로 가려는데, 아내가 왜 그쪽으로 가냐고 한다. 아내가 내 의도를 오해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다시 물어본다. 산을 넘어 4.19쪽(국립 4.19 민주묘지)으로 가려고 한다니까, 괜찮다고 한다. 대신 가장 짧은 길로 가자고 한다. 원래 내 계획은 북한산성 능선 대동문을 거쳐 가는 것이라 가장 짧은 길은 산행이 아닌것 같다. 마음속 갈등이 생기지만, 일단 청수계곡으로 향한다.

이제 4월 19일인데 햇살이 따갑다. 화창하고 따뜻한 봄이어야 하는데, 이번 주 들어 갑자기 28~29도까지 오르는 초여름 날씨다. 당장 기온도 문제지만, 봄 부터 뜨거운 햇빛 열기가 축적되면 여름엔 푹푹 찌는 날씨가 된다.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가벼운 행복과 무거운 기후변화를 어떻게 연결시킬지 답을 못 찾겠다.
아내에게 모자를 가져다 준다니까 그냥 가자고 한다. 집에서는 작은 오해가 생기면 갈등으로 증폭되곤 하는데, 산행계획에 큰 오해가 있었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사라진다. 기후변화는 싫지만 이런 기류변화는 좋다.
쉼터 오르는 길은 첫 번째 깔딱 고개다. 겨울에는 이 길을 거의 뛰다시피 올랐는데, 이른 더위에 힘이 쭉 빠진다. 힘들어하는 아내와 천천히 걸으니 샘물, 줄딸기 꽃이 보인다. 정릉 2교 갈림길에서 원래 가려던 산행 계획을 내려놓는다. 무조건 아내가 제시한 쉬운 길로 가야겠다는 마음이 차오른다. 어느 길이든 함께 가면 된다. 연초록 숲이 이렇게 사람 마음을 연하게 녹인다.


넓적 바위를 지나 칼바위능선 중간부로 오르는 길은 사람이 드문 길이다. 청수계곡 입구에 지고 있던 진달래가 아직 활짝 피어있다. 철쭉도 피기 시작한다. 진달래와 철쭉이 함께 피어있으니 구분하기 쉽다. 앞서거나 뒤서거니, 아이 얘기, 딱따구리 얘기, 꽃 얘기, 일상의 얘기를 나누며 조금씩 고도를 높여간다. 양지꽃, 현호색, 괴불주머니는, 병꽃은 덤이다. 칼바위 능선을 앞에 두고 꽃비를 만난다. 남아 있던 벚꽃 잎이 연초록 숲 속을 날아다니는 모습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칼바위능선 갈림길에 도착했는데, 구천폭포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은 지난해 8월부터 통제 중이다. 아내 얼굴을 바라본다. 아내는 칼바위 능선을 오를 수 있다고 한다. 때맞춰 박새가 '삐쭉삐쭉삐쭉' 울어 댄다. 칼바위 능선 바위가 삐죽삐죽하다고 우는 것 같다. 첫 번째, 두 번째 가파른 암릉을 무리 없이 오른다. 동쪽으로는 강북으로 내려앉는 산세가, 서쪽으로는 보현봉에서 내려앉는 모습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앞이 트인 바위에 오르니 청수계곡 너머로 형제봉, 백악산, 인왕산, 안산까지 봉우리와 능선이 이어진다.

이 계절의 산은 마치 타임랩스 영상처럼 빠르게 색이 바뀐다. 옅은 회갈색의 산에 옅은 연두빛과 분홍빛이 보일 듯 말 듯하더니, 어느새 연초록 산이 되었다. 올해는 며칠 만에 활짝 핀 벚꽃처럼 더 빨리 색이 바뀌었다. 연초록 산이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다양한 스펙트럼의 색이 담겨있다. 짙은 소나무의 녹색부터, 노란 계열, 연두 계열, 연초록, 초록까지 다양하다. 그 중간에는 먼셀(Munsell) 넘버로 규정하기 어려운 색이 섞여 있다. 산벚꽃의 연분홍색, 진달래의 채도 높은 보라색, 철쭉의 다홍색, 귀룽나무 잎의 밝은 초록색까지 화사한 빛깔에 눈이 호강한다. 봉우리와 골짜기에 따라, 구름 그림자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봄 산은 색채의 천국이다.
아내의 걸음 속도에 맞춰.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 보니 칼바위능선 정상 석가봉이다. 6주 전 보았던 설경은 아득한 과거의 한 때로 여겨진다. 봄이 되면 바뀌는 숲이지만 지나치게 빠른 변화가 어지럽기도 하다. 석가봉 주변에 남아 있는 진달래는 빛깔이 참 곱다. 칼바위능선이 산성주능선을 만나는 곳을 지날 때마다 2020년 3월 아이와 올라와 김밥을 먹었던 기억이 떠 오른다. 아이와 즐거웠던 시간이었지만, 차가운 봄바람에 산에 온 기억에는 미안한 감정이 따라다닌다.


산성주능선을 따라 대동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편안한 길이다. 부드러운 길을 가야 마음이 부드러워진다는 아내의 말을 새겨듣는다. 앞서 걷던 아내가 또 장지뱀을 발견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장지뱀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내가 발견한 장지뱀이 무려 다섯 마리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다니... 아니, 예전에 아이들 대상으로 생태교육을 했던 실력이 사라지지 않았구나.


대동문 공터에는 평소보다 등산객이 많다. 작년 4월 20일, 아내, 아이와 함께 북한산 산행을 하며 점심을 먹었던 쉼터로 간다. 벚꽃 잎이 간간히 떨어지는 숲 속 식탁에서 아내와 함께 먹는 김밥과 커피 한잔은 최고의 점심이다.
대동문 밖으로 나와 진달래 능선으로 들어선다. 여전히 진달래가 많이 피어 있다. 2년 전 갔던 길을 따라 백련사 코스로 내려가는 대신, 운가암 방향을 선택한다. 산행에 오해가 있었던 만큼 가장 빠른 코스를 통해 독립운동가 묘역(수유 국가관리 묘역)으로 가자고 하니 아내도 좋다고 한다.


운가암 코스는 가파른 숲길이 계속 이어진다. 흔한 전망대 하나 없이 계속 내리막길이다. 아내는 이런 한적함도 좋다고 한다. 초긍정모드다. 근대식 건물인 운가암 입구를 지나니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던 가인 김병로 선생 묘역이 나온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몰랐던 분인데, 어쩌다 자료를 검색해 보니, 일제 강점기 때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무료 변호한 인권변호사의 표본이었다. 암울했던 시기, 봉건 왕조와 일제를 함께 밀어내는데 기초를 쌓은 분들의 사상과 삶은 지금 시대와 연결이 된다.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가끔 왔던 길을 지나 근현대사 기념관 옆으로 나오니, 바람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함께 산행한 아내에게 <제니스커피 앤 키친>에서 커피를 사준다. 커피가 맛있고, 사장님이 친절하고 분위기가 편안하다. 가파른 길을 내려온 피로가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느낌이다.
카페 밖 햇살은 여전히 뜨겁지만, 10분 거리에 있는 국립 4.19 민주묘역에 들른다. 2월 말 대구에서 시작된 시위가 3.15 부정선거 항의 시위로 이어졌고, 4월 19일에 전국적인 항쟁으로 번져, 4월 26일에 마침내 이승만을 하야시킨 4.19 혁명이다. 약 200여 명이 혁명과정에서 사망하고, 60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그런 희생으로 민주주의 기초를 다졌기때문에,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4
.19 혁명이 실린 것이다.
산 위를 뒤덮는 연초록 잎은 멀리서 보면 낭만이지만,
나무에게는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4.19 혁명 66주년 뜨거워진 봄,
인류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초록숲이 그 답을 알려주고 있다.
4.19 민주묘지역으로 걸어가다 보니 옆으로 흐르던 대동천이 복개되어 길 아래로 파묻혀 있다. 정치적 독재자는 이제 한국에서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토건자본주의는 아직도 곳곳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자연하천이 어둠 속을 흐르는 것은 우리의 또 다른 역사가 묻혀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산 위를 뒤덮는 연초록 잎은 멀리서 보면 낭만이지만, 나무에게는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4.19 혁명 66주년 뜨거워진 봄, 인류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초록숲이 그 답을 알려주고 있다.
#산행정보
산행지: 북한산 칼바위능선-진달래능선 (서울 성북, 강북)
날 짜: 2026년 4월 19일
날 씨: 맑음
일 행: 2명 (맑은물+아내)
산행코스: 청수계곡 - 칼바위능선 - 석가봉 - 대동문-진달래능선 - 4.19 기념탑
산행시간: 3시간 30분 (11시 ~ 14시 30분)
교 통: 청수계곡 (북한산 정릉지구 버스 혹은 경전철 우이신설선), 4.19 민주묘지역 (경전철 우이신설선 / 서울시내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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